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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칼럼]中國에서 孝의 상징인 崔溥(최부)先生
[강원구 칼럼]中國에서 孝의 상징인 崔溥(최부)先生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6.08.23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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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50년전 아놀드 토인비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파고다공원에서 손자와 할아버지간에 실랑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할아버지가 장기을 두고 있는데, 손자가 엄마기 진지 잡수게 오시라고 한다면서 끌어당기고, 할아버지는 밥이고 뭐고 장기만 두는 것을 보았다. 그가 말하길 “한국은 머지않아 선진국이 될 것이며, 만약 지구가 멸망하고 새로운 별로 이주해야 한다면 효를 가지고 가야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중국 3대 기행문의 하나인 ‘표해록’의 저자 최부선생이 중국에서 효(孝)의 대명사로 알려지고 있다. 요녕대학 풍옥충 총장이 우리 지역 대학에서 특강을 하면서, 한국에서 가장 훌귱??사람은 이순신장군이며, 두 번째는 중국에서 효의 상징으로 알려진 최부선생이라고 말하고, 최부선생의 묘에 가서 절을 하고 엎드려 감격해 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2013년 나주에서 뜻 있는 분들이 모여 ‘최부선생 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다. 2002년 11월, 2004년 10월 나주시의 주최로 두 차례에 걸쳐 최부 선생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고, 2010년 8월 중국 항주 절강대학에서 ‘최부지려(崔溥之旅)’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금남 최부(錦南 崔溥 1454∼1504)선생은 나주시 동강면 성지촌에서 태어나 1477년 때 진사에 합격하고, 1486년에는 중시(重試)에도 합격하였다. 1487년 9월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제주로 도망간 노예들을 육지로 보내는 일을 하였다.

1488년 윤 정월에 부친상 소식을 듣고 급히 제주에서 배를 타고 오다 추자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43명과 14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는 동안 풍랑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해적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으며, 절강성 태주부 임해현 우두외양(牛頭外洋)에 상륙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왜구는 먼저 살해하고 보고만 하게 되어 많은 주민들이 창과 칼을 가지고 나와 왜구인 줄 오인하고 위협을 하였는데, 최부선생이 조선 선비라고 말하자, 그때부터 존경과 대접을 받게 되었다. 태주, 영파, 소흥을 거쳐 항주에서 경항대운하를 따라 소주, 양주, 북경까지 도착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그는 표류중이거나 귀국할 때까지 항상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명나라 황제를 알현(謁見)할 때도 옷을 갈아입지 않겠다 하여 관리들의 애를 먹게 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이 얼마나 효(孝)를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북경을 출발하여 산해관, 요양, 구련성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러 귀국하였는데, 여정이 8천여 리에 달했으며, 135일간의 체류를 한 후 7월에야 한양 청파역에 도착하였으며, 성종의 명으로 ‘표해록(漂海錄)’을 남겼다.

중국의 3대 기행문인 표해록,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일본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중에서 표해록이 가장 좋은 기행문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최부 선생의 해박한 지식으로 중국 전역을 속속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표해록에 한중일의 대외관계를 알 수 있다. 일본과 명나라는 그 당시에도 왜구가 자주 출몰하여 중국을 괴롭혔으며, 5백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중국과 일본, 중국과 한국의 관계가 변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해록은 당시 명나라의 해안방비, 정치, 운하, 지리, 민속, 언어, 문화와 두 나라 관계 등을 연구하는데, 중국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거나, 미흡한 부분의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표해록은 일반인에게는 볼 수 없다가 1573년 외손 유희춘(柳希春) 선생이 발간하여 세상에 내놓았으며, 일본에서는 1769년 청전군금(淸田君錦)에 의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로 발간되었다.

1965년 미국인 John Meskill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1979년에 최기홍선생이 우리말로, 1992년 북경대학 갈진가(葛振家) 교수에 의해 소개되어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성종은 “공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사지(死地)에 다니면서도 국위선양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김종직의 문하로서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다른 문인들과 함께 장형(杖刑)을 받고, 단천으로 귀양가, 1504년 10월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51세로 그의 포부와 경세제민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비운을 만나 끝내는 죄 없이 죽고 말았으니,

그 당시 사림(士林)들은 몹시 애석해 마지않았다.

중국 절강성의 관리들은 최부 선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최부 선생의 길을 따라 한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강소성 무석시 석혜공원에도 최부 선생의 기념비가 있다. 무안군 몽탄면 최부 선생의 묘는 무안군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정비가 되었지만, 나주시 동강면 성지촌에는 조그만 비석만이 쓸쓸하게 세워져 있을 뿐이다. 앞으로 나주시에 최부선생의 기념비가 세워지기를 바랄 뿐이다.

 

 

 

2016년 8월 22일
姜元求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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