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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7
[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7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8.04.02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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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중심 상해(上海)
상해는 세계적인 도시답게 우리나라 전역으로 항공노선이 있다. 공항이 홍교공항과 포동공항이 있는데 홍교공항은 시내와 가까이 있어 아주 편리하다. 요즈음 국제선으로 서울 김포공항과 국내선이 동시에 취항하고 있고, 포동공항도 국내선과 국제선이 동시에 취항하고 있다.

포동공항은 새로 만든 공항으로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고, 국내 국제선 모두를 운항하고 있지만, 시내로부터 멀리 있다. 포동공항에서 시내까지 50km에 이르지만 자기부상열차가 400km 속도로 운행하고 있어 7분이면 주파할 수 있다.

상해의 면적은 서울의 10배가 넘는 초대형 도시로 2천만명이 넘는 세계의 중심 도시이다. 옛날에 상해는 바다 밑에 있어, 바다 위에 생긴 땅이라 하여 상해라고 한다. 양자강 하류가 점점 퇴적되면서 토사가 쌓이기 시작하여 상해가 된 것이다.

중국을 가리켜 용이 살고 있는 나라로 표현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상해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빌딩이 올라가고 있다. 세계 거의 모든 기업이 상해에 들어와 있다. 소비 패턴을 보면 자동차, 컴퓨터, 휴대폰 등이 엄청난 속도로 보급되고 있고, 코리아타운도 많이 발전하고 있고, 상가들이 한글로 되어 있어 한국어만 사용해도 가능할 정도이다.

야경의 1번지 외탄(外灘)
상해의 대표적인 강이 황포강(黃浦江)이다. 황포강을 관광하는 곳이 외탄이며, 건너편이 포동지구이다. 외탄은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려야 할 상해의 상징이다.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수십 개의 서로 다른 서양 건물들이 즐비하다.

외탄은 최근 몇 년 간 급속한 변화로 상해 전체의 새로운 모습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야경은 상해박람회로 인하여 더욱 아름답게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올라온 아낙네들이 어린아이를 안고 외국인들만 보면 돈을 달라고 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광경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외탄 건너편의 포동지구는 밤과 낮이 따로 없이 볼거리가 많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지역이 아닌 523㎢나 되는 거대한 지역으로 90년대 이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하여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으며, 동방명주탑은 많은 관광객이 몰려 많은 시간이 걸린다.

황포강 밑으로 여러 개의 지하도가 개통이 되어 수많은 차량이 왕래하고 있다. 외탄의 황포공원은 1860년대에 영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 당시 공원 입구에 ‘구여화인 부진입내(狗與華人 不進入內)’라고 쓰인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개와 중국인은 들어오지 마라’ 중국인의 자존심을 무시하는 말이다. 바로 옆에 상해시 인민영웅기념탑과 외탄역사기념관 등이 있다. 지금은 상해 시민이 애용하는 휴식처로, 이른 아침 태극권을 하는 사람들이나 밤에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를 많이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府)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역사시간에 많이 배워 귀가 아플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상해시 마당로 보경리에 위치한다. 이곳은 1840년 이후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였다. 임시정부가 있는 마당로는 가로수가 플라타너스로 되어 있어 낙엽이 지면 보기가 흉하지만, 여름이 되면 거대한 숲을 이루어 보기 좋고, 옛날에는 초라한 건물들이었지만, 지금은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다수의 한국 지사들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전체적인 독립운동을 이끌 수 있는 권위 있는 기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3월 17일 비밀리에 상해로 망명해 온 여운형, 현순, 선우혁, 김철, 서병호, 최창식, 신규식 등이 당시 보창로(현 회해로)에서 조직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했음을 선포하여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다. 임시정부 청사는 1945년 해방까지 27년 간 상해를 비롯하여 절강성 항주(杭州)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

그 후로도 임시정부는 가흥(嘉興), 진강(鎭江), 장사(長沙), 광주(廣州), 유주(柳州), 기강(綦江), 중경(重慶) 등으로 몇 차례 옮겨 다녔다.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구(金九)선생이다.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고 봉건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동학에 가입하기도 하였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육군 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징역 살기도 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갔다.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장군, 김수환 추기경, 김대중 대통령이 방문하여 기록을 남겼다. 이외에도 유명한 인사들이 많이 방문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다. 김구선생이 일생동안 애송했다는 서산대사의 시를 직접 쓴 액자가 70년대에 발견되었는데, 그 복사본이 걸려 있다.

눈을 밟고 길을 걸을 때는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가는 발자국이 뒤 따른 사람의 길이 된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蹟(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2018년 4월 2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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