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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칼럼]역수(易水)를 지나면서
[강원구 칼럼]역수(易水)를 지나면서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7.08.14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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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중국 하북성 백석산에서 답사해주도록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백석산은 800리 태항산 맨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정상 불광정은 2096m으로 장가계는 4성급이지만, 이곳은 5성급 관광지이다. 새로이 유리잔도가 만들어져 무서워 지나가는 사람들의 탄성소리가 더 즐거웠다.

가는 길에 탁주(涿州)를 지나가게 된다. 탁주는 당나라시대 범양으로 불렸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와 장비의 고향으로 관우와 도원결의를 한 곳으로 유명하다. 몇 번 가본 적이 있어 이번에는 가지 않고 중국 제일의 협곡이라는 백리협곡에 들어가니 높은 절벽과 폭포, 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힐링하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지나니 역현(易縣)이란 글자가 나왔다. 이곳에 역수(易水)가 지나가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가이드가 이곳에 이수호가 있는데, 소계림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易자는 ‘바꿀 역’이나, ‘쉬울 이’로 읽는데, 가이드들 모두가 이수라고 말하고, 그들이 만든 안내 책자에 이수호로 적혀 있었다.

혹시 내가 알고 있는 역수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 역수로 발음하지 않는가? 물어보니 역수가 아니고 이수로 읽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도착한 날 저녁에 시청의 초대에 간부가 나와 우리와 함께 만찬을 하게 되었다.

이야기 하는 중에 “혹시 춘추전국시대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출발한 지역인가?” 물어 보니 “맞다”고 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물어보면서 그것에 대한 시를 읽곤 하였다. 그래서 가는 길에 그 호수를 가 보기로 하였다.

요즈음 중국 관광지는 한글로 번역이 되었지만 잘못 번역된 곳이 많다. 그래서 그곳에도 한글로 ‘이수호’로 번역되었는가 보았더니, 다행히 ‘역수호’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생각하지 못했던 곳을 보았으니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면서 이곳은 역수로 읽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안내문에 역수로 바꾸도록 부탁하였다.

역수의 고사를 보면 형가는 중국 전국시대의 자객으로 위(衛)나라 사람으로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젊어서는 여러 나라를 돌아 다닌 뒤, 귀국하여 관료에 뜻을 두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연(燕)나라에 들어가 고점리라는 악기를 잘 타는 사람과 친하게 지냈으며, 장터에서 술을 마시다 취하면 고점리가 켜는 악기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술꾼으로 살면서도 독서를 좋아했고, 당시 유력자였던 전광(田光)의 빈객(賓客)이 되었다.

기원전 233년, 연나라의 태자(太子) 단(丹)이 인질로 있던 진나라에서 도망쳐 왔다. 단은 진시황이 되기전 진왕(秦王) 정(政)과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지만, 진왕이 된 후 자신을 낮춰보는 것에 분노한 그는 연으로 도망쳐 복수를 꾀하게 된다.

태자 단은 진왕에게 자객을 보내려고 전광으로부터 형가를 추천받았다. 형가는 조심스럽게 진왕에게 가까이 다가갈 방법으로 연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독항(督亢) 지역을 바치는 것과 과거 진나라의 장군으로 연나라에 망명해 온 번어기(樊於期)의 목을 바치는 것이었다.

태자 단은 자객 임무를 수행하는데 진무양이라는 자를 형가에게 동행시켰다. 진나라로 떠나던 날 태자 단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소복을 입고 역수까지 전송하러 나왔다. 모두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도 고점리는 악기를 타고, 형가는 그의 심정을 노래하였다.

風蕭蕭兮 易水寒(풍소소혜 역수한)
壮士一去兮 不復還(장사일거혜 불부환)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찬데, 장사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이 시는 사마천의 사기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면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고 있는데, 형가는 배를 타고 떠나며, 끝내 뒤를 뒤돌아 보는 일이 없었다. 당시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 처절한 연주와 형가의 노래하는 소리에 머리카락이 솟았다고 한다.

진에 당도한 형가는 영토 할양의 증표인 지도와 번어기의 목을 진왕에게 바치는 형식을 취하며 진왕은 크게 기뻐하며 형가를 맞 했다. 그런데 진무양이 진왕 앞에서 무서워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그만 벌벌 떨기 시작하였다.

지켜보던 군신들이 미심쩍어 어떻게 된 거냐며 묻자 형가는 웃으며 “북쪽의 촌놈이 왕을 뵈니 어쩔 줄을 몰라 그렇다” 라며 둘러댔다. 형가는 직접 진왕에게 지도를 해석해주겠다며 가까이 접근하여, 두루마리로 된 지도를 풀자 두루마리 끝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비수가 나타났다.

그는 비수를 잡고 진왕의 소매를 잡아 그를 찔렀지만, 아슬아슬하게 진왕의 옷소매만 끊어지고 실패하고 말았다. 형가는 진왕의 검에 다리를 베여 더 걷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진왕을 향해 비수를 집어 던지지만, 비수는 진왕을 비껴가서 기둥에 박혔다. 격노한 진왕이 형가의 온몸을 산산이 토막내 버렸고, 연을 쳐서 멸망시켜 버렸다.

사마천은 ‘형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비록 그 암살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품은 뜻의 높이 때문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시인 도연명은 영형가(詠荊軻)라는 시를 지어 ‘형가는 죽었지만 그 뜻은 남아있네’라고 읊었다.

중국에 있을 때 구채구(九寨沟)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우리 언론에 구채구를 원음으로 한다면서 ‘지우자이거우’나 ‘주자이거우’로 쓰고 있다. 중국 현지에서 ‘지우자이거우’ 말하면 알아 듣는 사람이 없다.

중국은 우리의 지명이나 이름을 중국식으로 읽는데, 우리는 중국의 지명이나 이름을 우리 말로 읽지 않으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데, 굳이 원음도 아닌 발음을 사용하는 것은 무언가 잘못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백석산 답사에 높다란 절벽을 돌고 돌아 만든 잔도를 걸으면서, 백석산 전체를 볼 수 있었고, 백리협의 아름다운 풍광, 폭포를 바라보면서 힐링을 했으며, 북쪽의 계림이라 부르는 역수호를 뜻밖에 보면서 중국은 아직도 관광할 곳이 너무나 많구나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2017년 8월 13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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