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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칼럼]주자(朱子)선생과 무이산(武夷山)
[강원구 칼럼]주자(朱子)선생과 무이산(武夷山)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7.05.25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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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태산에서 공자(孔子)가 있다면, 복건성 무이산에 주자(朱子)선생이 있다. 주자선생이 그곳에서 50년간이나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주송(朱松)은 강서성 무원인데, 복건성 우계(尤溪)에서 벼슬을 하면서 주자를 낳았다.

주씨는 원래 당나라시대 황건적으로 난으로 소주에서 안휘성 자양산 아래 휘주(徽州)로 이거하여 신안주씨(新安朱氏)가 형성되었다. 신안(新安)이란 춘추시대 사용했으며, 그 뒤 휘주로 사용되었다가, 황산(黃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 신안주씨는 주자선생의 증손인 주잠(朱潛)선생이 송나라가 망하자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생겼다. 주자선생은 사상가이면서, 교육가이고, 시인이다, 그가 어린이들을 위한 권학시(勸學詩)는 유명하다.

소년은 늙기는 쉬우나 학문은 이루기가 어렵나니,
짧은 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마라.
연못의 봄풀이이 깨어나기도 전에,
섬돌 앞에 오동나무는 이미 가을 소리를 낸다.

少年易路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 已秋聲

무이산에서 유명한 곳은 무이구곡(武夷九曲)이다. 그는 무이구곡에서 ‘무이구곡가’를 지었는데, 우리나라 퇴계선생은 ‘도산십이곡’, 율곡선생은 ‘고산구곡가’를 짓기도 하였다. 무이구곡에 대나무 뗏목을 타고 2시간 동안 내려가는 것이다.

계곡마다 주자선생의 ‘무이구곡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내려 갈 때 수십 개의 뗏목이 내려가는 장면은 아주 장관이다. 무이구곡은 36개의 봉우리와 37암(巖) 사이로 흐르며 계곡과 양안의 절벽은 중국 제일의 명승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산은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않고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을 돌아가고,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돈다.

山無水不秀 水無山不淸
曲曲山回轉 峯峯水抱流

무이산 위에 신선이 있어
산 아래 흐르는 물이 굽이굽이 맑은데,
절경을 알고자 하거든
한가로이 뱃놀이 소리를 들어보게나.

武夷山上有仙靈 山下寒流曲曲淸
欲識箇中奇絶處 櫂歌閑聽兩三聲

무이산에는 커다란 항아리 같은 바위들이 많으며, 옥녀봉, 쌍유봉, 대왕봉 등 다양한 모양이 즐비하다. 천유봉은 천 길의 절벽 위에 암봉이 우뚝 솟은 무이산 최고의 절경으로 오르는 888계단으로 30여분이면 오를 수 있다.

예부터 ‘천유봉을 무이산 제일의 경치’라 했고, ‘천유봉에 오르지 않으면 무이산을 구경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실같이 이어진 좁을 길을 올라 정상에 이르면 수많은 봉우리가 내려다보이고, 무이구곡의 뗏목들이 돌아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산을 보려면 황산을 보고, 산봉우리를 보려면 장가계를 보고, 물을 보려면 계림을 보고, 물과 산을 보려면 무이산을 보라’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무이산은 산과 물이 어울린 곳이다. .

천유봉에 가는 길은 주자선생아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다. 유리벽 안에 800년전 벽이 남아 았다. 그곳에 ‘태산에 공자가 나오고, 무이산에는 주자가 태어났다’라는 글구가 있다.

주자는 부친이 14세 사망하였지만, 18세 대과(大科) 급제하였다. 당시 평균 연령 35세에 합격하였으니 얼마나 천재였는가는 알 수 있다. 주자는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중국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한국은 물론 일본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무이정사내에 퇴계선생의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다.

주자가 살았던 오부리(五夫里)에 가면 자양루가 있다. 이곳에 커다란 주자선생의 석상이 있다. 9개 계단은 9년간 벼슬하였고, 석상의 밑까지 1.4m는 14세에 공부를 시작했으며, 석상 높이는 71자로 71세까지 살았으며, 석상 둘레가 50m 인데, 이곳에서 50년간 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석상 옆으로 아주 크게 주자묘(朱子廟)를 짓고, 앞에 넓은 연못을 만들기로 하고 땅을 구입해 두었다. 주자선생의 묘가 있는 건양구 황갱진에 가면, 10m 정도 되는 석상과 기념관을 짓고 있으며, 무덤은 돌로 만들어져, 잡초 하나 나지 않게 되어 있었다.

건양 시내 강물이 흐르는 곳에 고정서원(考亭書院)은 입구만 남아 있는데, 새로이 서원을 만들고 있었다. 그곳에서 주자선생이 1200년에 강의하다 돌아가셨는데, 전국에서 1000여명의 학자들이 몰려 장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다. 풍수지리학자들이 주자선생의 묘가 용이 꿀틀거리는 용맥이라고 그려져 있고, 1999년 후손들이 세운 사원정(思源亭)과 한국 정주학회에서 만든 주부자림(朱夫子林)이란 비석에 세워져 있다.

무이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대홍포차다. 대홍포차 원조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높다란 바위를 지나가야 한다. 3km정도 들어가면 6그루가 있는데 지금은 유네스코에 등록되어 ‘보호수’로 보호받고 있다. 조상격인 1세 6그루가 있으며, 바로 옆에 2세 차나무가 있고, 주변에 3대, 4대, 5대 차나무가 계속 생산되고 있다.

대홍포(大紅袍)는 무이산에서 생산되며 ‘차중지성(茶中之聖)’으로 칭송된다. 세계 명차 중 으뜸이며 중국의 국보급 차인 대홍포는 유네스코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한 무공해 지역인 무이산에서 생산되는 귀한 차이다. 예로부터 ‘차의 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무이산 풍치지구 구룡과 절벽에서 자라는 차이다.

대홍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건륭황제가 우연히 무이산의 수려한 산세에 반해 대홍포차로 잔병을 치유하고, 이 차나무를 국가 보호 유물로 지정하면서 부터이다. 예부터 모두 황궁에 공납하는 궁정공품(宮廷貢品)이었다. 그래서 국보 대홍포(大紅袍)로도 불리기도 한다.

대홍포 전설은 어느 왕조 때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황실의 황후가 이상한 병에 걸린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황후는 위장이 붓고, 소화도 되지 않으며, 정신마저 흐릿해지는 특이한 병이 들었다. 황제는 어의를 데려오고, 도사를 시켜 묘약을 찾게 하였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

황제는 겨울이 오면 용포(龍袍)로 그 차나무를 감싸게 하고, 두 명의 노인에게는 호수장군(護樹將軍)의 칭호를 주고 대대손손 그 직을 세습하면서 해마다 찻잎을 채취한 후 이를 잘 다듬어 황실에 올리도록 어명을 내렸다.

중국 국보 대홍포가 2005년 4월 4일 상해 국제차문화절 주관으로 열린 경매에서 20그램에 인민폐 18만 위안에 낙찰되어 새로운 경매 신기록을 세웠다.
2017년 5월 25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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