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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칼럼]압해도 정덕성(丁德盛)선생 유적
[강원구 칼럼]압해도 정덕성(丁德盛)선생 유적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6.12.14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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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행정학박사
압해도에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목포에서 압해대교를 거쳐 들어가는 길이 있고, 무안공항을 지나서 운남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압해대교가 건설되자마자 승용차로 정덕성선생의 묘를 찾아 가보려고 갔으나, 이정표가 없어 찾지 못하고 송공항에 가서 회만 먹고 돌아왔다.

그 뒤로도 압해도를 잘 알거나 압해정씨들을 만나는 사람마다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 시간을 내자고 말은 했지만, 같이 가는 사람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레 되었다. 며칠 전 그 동안 알고 지내던 압해정씨 광주전남종회 부회장인 정병일선생을 만나 시간을 내어 함께 가게 되었다.

압해도에 천년이 넘도록 정덕성선생의 묘이 있으며, 묘 주변으로 오래된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묘까지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압해정씨 유명한 인물들의 조그만 비석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일권 국무총리, 정래혁 국회의장, 정세균 현 국회의장 등 수십명의 비가 가지런히 있었다.

역사적으로 그의 후손들 중 인물로는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丁若鏞)선생을 들 수 있다. 조선 중종 때 정환(丁煥)․정황(丁黃) 형제가 학문으로 이름이 있고, 정극인(丁克仁)은 국문학사상 최초의 가사인 상춘곡(賞春曲)의 작가로서 잘 알려져 있다.

정덕성선생은 중국 당나라 사람으로 통일신라시대 853년 압해도에 온 한국정씨의 시조가 된다. 그의 고향은 중국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당하현(唐河縣) 대천(大川) 사람이다. 따라서 '압해'는 정(丁)씨의 발상지가 되며 모두 정덕성의 후손 분파인 것이다.

금년 압해정씨종친 회원 30여명은 당하현을 방문하여, 당하현 현장 등 고위직 인사들로부터 나와 축포를 쏘면서 환영식을 가졌으며, 상호 교류 방문을 하자는데 합의했다고 한다.

그의 묘가 있는 곳은 압해읍 대천리이다.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 했으면, 마을 이름까지 같을 수 있었을까. 그가 신라에 오게된 것은 16세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양자강을 따라 오다 풍랑을 만나게 되어 압해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원래 정씨는 강태공(姜太公)의 첫째 아들 정공(丁公)에서 비롯된다. 신안군 압해도가 옛날에 임치현(臨淄縣)으로 쓰였던 것을 보면 압해정씨의 뿌리가 산동성 임치현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정씨들이 산동성 임치현에서 하남성 남양시 당하현 대천리로 옯긴 것이 된다.

치(淄)라는 글자는 산동성 치수(淄水)에만 사용되는 글자다. 제(齊)나라가 치수에 임(臨)해서 나라를 세웠다하여 제나라 수도가 임치현(臨淄縣)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치(淄)를 사용하지 않는다. 10여년 전 신안군에서 특강을 할 때가 있었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임치현을 사용한 것을 보고, 분명 무슨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압해정씨의 본관은 나주․영광․창원․의성(義城)이 나뉘어 있으나 모두 압해정씨에서 나왔다.

이번에 정덕성선생의 묘를 보고 느낀 점이 있다. 이곳은 한국과 중국간에 교류하는데 중요한 곳이 될 수 있다. 군문화재는 등록되어 있는 것 같다. 땅은 넓은데 들어가는 입구의 ‘압해정씨 도선산(押海丁氏 都先山)’이라는 비석이 초라하며, 사당이 너무나 초라하고, 묘까지 들어가는 길이 아름답지 못했다.

사당이나 묘에 들어가는 길은 사철나무를 심고 주변의 산에 나무들을 개량하고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고, 사당은 하나의 건물보다 몇채의 건물을 짓고, 주차장은 아래로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전라남도가 많은 관심을 갖고 문화재로 승격시킨다면 좋은 관광지와 한중교류의 디딤돌이 될 것은 분명하다.

 

 

2016년 12월 14일
姜元求 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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