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凡村 박동오' 선생의 지나온 삶과, 아름다운 마음을 일등뉴스 공성남기자가 올립니다.
'凡村 박동오'는? |
전남 강진출생
학력 문학 저서 수상 |
기자는 11월 첫눈이 내리던 날 시골친구의 권유로 모임을 따라가게 되는데 이 모임은 강진태생의 광주에 사는 선후배들 모임인 ‘강진모임’에 참석을 하고, 이 모임에서 인사를 하며 식사를 마치자 차를 준비하는데 박동오 선생님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살아온 과정을 들려주었다.
차가 들여오고 찻잔을 선생님에게 건네 드리고 “살아오시면서 좋은 일 옛이야기 좀 들을 수 있나요?” 하자 선생님이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강진군 옴천면 계산 산 좋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이곳 마을에, 당시 나이 7세 영문도 알지 못하고 아버님 손에 이끌려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며 저 만주를 향해서 갔었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부모님들은 ‘훌륭한 분이셨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일본군의 힘든 핍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만주를 향해 소달구지로 짐을 싣고, ‘계산’을 새벽에 떠나 뒤늦게 도착 한 곳이 ‘영산포’에 도착 하였고, 영산포역에서 야밤에 만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밤을 새우고 낮을 지나 국경 ‘만포철교’를 지나 만주 땅으로 들어서는데, 그동안에 일본 헌병들이 기차 안에서 심한 박해를 했고 내사를 하고 짐을 뒤지고, 그런 광경도 보았습니다.
‘만포’를 지나자 도착했던 그곳 ‘봉천(심양)’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다시 ‘통화’를 지나 유화, 삼원포에 하차해서 눈이 많이 와 무릎까지 쌓였는데, ‘오두마차’에 짐과 식구를 싣고 시골 길을 거쳐 거쳐서 ‘남산’이라는 마을에 이르러 그곳에 짐을 풀고 방을 얻어 살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 아버님은 일본에 대한 저항이 있어 그 당시 ‘마적’(노일영을 중심으로 한 독립투사모임)이라고 했던, 모임인 ‘노일영’(지리산만큼 큰 산맥 이틀쯤 걸어서 넘는 큰 산맥) 에 신분을 감추고 일본군이 ‘봉초’를 받아 쟁여 놓은 ‘볏가리’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독립군들의 식량을 ‘널’에 담아 공급하기도 했다.
한밤중에는 독립군들이 집으로 와서 쉬었다 가기도 했었고 어느 날 밤에는 자다가 눈을 떠 보니, 독립군들이“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중국의 광활한 대지위에”이런 애국가, 독립가를 부르기도 했었고, 몸에 감추고 있던 태극기,육혈파 (권총)를 꺼내 손질하는 모습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