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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현장] 전남 목포시, “공생원 역사를 전세계에 알린다!”
[취재현장] 전남 목포시, “공생원 역사를 전세계에 알린다!”
  • 박부길 기자
  • 승인 2021.12.14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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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등뉴스=박부길 기자] 전남 목포시(시장 김종식)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회장 권한대행 이연 상임이사)는 14일 오전 11시 목포시 해양대학로에 위치한 공생원에서 이연 공생복지재단 회장 권한대행(상임이사), 이승만 목포시청 공보관이 참석한 가운데 ▲공생복지재단이 역사 ▲공생복지재단산하시설(한국7, 일본5, 제주4, 서울1) ▲주요추진사업(고하도 개발, UN고아의날 제정, 목포시만 감사비) ▲목포의 보물인 공생원과 대반동 ▲공생복지재단의 목표 등을 발표했다.

김종식 목포시장은 “목포는 다른 도시가 지니지 못한 근대역사문화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공생원도 그 중 하나로 역사적 의미가 깊고, 특히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알려진 곳이다.”며 “목포시는 목포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글로벌관광도시로 힘찬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시민들과 함께 내실 있는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체계적으로 사업을 추진해 2025년에는 관광객 1천500만명, 외국인 5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글로벌 명품 관광도시로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이연 공생복지재단회장 권한대행(상임이사)은 “공생원은 윤치호. 윤학자 여사를 통해 꽃피운 기독교 성지이며, 목포 근대 역사문화 거리와 함께 일본인들이 더 큰 관심을 갖는 곳이다. 또한 공생원은 5천명의 고아들을 길러낸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역사로 공생원과 함께 마을 전체가 살아있는 근대역사 박물관이다”며 “이런 역사적 의미가 깊은 문화유적지인 목포를 전국과 세계에 알리고, 홍보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고 말했다.

김종식 목포시장은 “목포는 다른 도시가 지니지 못한 근대역사문화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공생원도 그 중 하나로 역사적 의미가 깊고, 특히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알려진 곳이다.”며 “목포시는 목포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글로벌관광도시로 힘찬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시민들과 함께 내실 있는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체계적으로 사업을 추진해 2025년에는 관광객 1천500만명, 외국인 5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글로벌 명품 관광도시로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이연 공생복지재단 상임이사는 “목포 공생원의 역사는 93년 역사를 가진,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복지시설이며 기독교 성지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윤치호 청년전도사가 길을 가던 중 다리 밑에서 굶주림에 떨고 있는 고아 7명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을 가엾게 여긴 윤 전도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목포시 대반동 유달산 자락에 터를 잡게 되는데 이것이 공생원의 시작이다.”고 말했다.

이연 공생복지재단 회장 권한대행(상임이사)은 이승만 목포시청 공보관에게 "공생원, 윤학자 여사와 기독교를 근대 역사거리와 연계해 역사문화 기행 상품을 개발해 목포를 전국과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다우치 치즈코)의 결혼 사진

윤 전도사는 120명, 30명, 100명, 원생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아이들과 밭을 일구는 등 자력갱생에 힘쓰는 한편 다른 전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 교육에도 마음을 쏟았다.

아이들 음악교육을 위해 인연이 닿은 목포 정명여고 교사인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 일본인)는 정치, 사회적 벽을 뛰어 넘어 윤치호 전도사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게 된다.

윤학자(다우치 치즈코)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관리였기에 결혼이 쉽지 않았으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치즈코의 어머니 도움으로 결혼에 이르게 됐다.

945년 해방이 되자 둘은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고아들을 계속 보살피게 되는데, 그때 이들 부부는 친일파로 몰려 공격을 받는다. 이때 방패막이가 되어 준 것은 공생원의 원생들이었다. 원생들은 윤학자가 “비록 일본인이지만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인간띠를 만들어 목숨을 지켜주었다. 「민족은 달라도 진심은 통한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도움을 받으면 이를 돌려준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공생원의 역사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공산당 세상이 된 한국에서는 제일 먼저 군인, 경찰, 특히 목사나 전도사는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혀 죽임을 당했는데, 그때도 원생들과 목포 시민들이 두 사람을 보호해 주었다. 특히 고아들은 “두 분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입니다.”라고 하면서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매달렸다고 한다.

전쟁이 한 참일 때, 공생원에는 전쟁고아들이 밀려들면서 5백여 명이 되었다. 윤치호는 그들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러나 윤학자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을 기다리며 3천 명의 고아들을 길러낸다.

그녀는 국경을 초월한 헌신적이고 숭고한 고아 사랑 정신을 인정받아 1963년 한국 정부로부터 외국인 일본여성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고, 1965년에는 목포시 최초 시민상을 수상한다. 일본에서는 윤학자 여사 후원회가 조직되어 고아들을 위한 많은 성금이 답지했으며, 1967년에는 일본정부가 남수포장을 주어 그녀의 평생의 공적을 기렸다.

무심한 세월은 흘러 1968년 가을, 그녀는 5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당시 목포시 인구는 10만 명이었는데, 3만 명이 목포역 광장에 모여 그녀와의 슬픈 이별을 아쉬워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목포가 울었다”라고 썼다.

고아 사랑은 대를 이어 지속 된다. 큰아들 윤기는 20년간 원장을 맡으면서 윤학자 여사의 뜻을 더욱 크게 펼친다. 일본항공(JAL)은 고아들을 위한 아파트를 기증했고 수선화 합창단을 만들어 일본공연을 하였으며, 오사카 시민들은 고아들에게 아파트와 식당을 신축해 주었다.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다우치 치즈코)여사

1994년에는 윤학자 여사의 일대기를 한일 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이 만들어지고, 2000년 일본에서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고, 그것을 본 오부지 게이조 수상이 당시 공생원 원장이었던 윤학자 여사의 손녀이며 윤기 회장의 외동딸인 윤록(일본명 미도리)에게 직접 전화와 함께 매실나무를 보내주었고, 윤학자 여사의 고향 일본 고치현 주민들은 3억원의 성금을 모아, 목포에서 비석을 가져다가 탄생기념비를 세워주었다.

그 후, 윤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에, 일제 강점기 때 징용이나 정신대 등으로 끌려간 후 현재 고령으로 오갈 데 없는 재일교포들을 위한 양로원, ‘고향의 집’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그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정부로부터 훈포장, 그리고 삼성그룹으로부터 ‘호암상’을 수상하게 된다.

윤학자 여사는 그녀의 치료비보다 고아들의 교육비를 더 걱정해 일본에서의 치료를 거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숭고한 사랑은 공생원을 거쳐간 5천명의 고아들과 공생원을 아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다. 공생복지재단은 그녀의 정신을 유지·발전시기 위해 ‘UN 세계 고아의 날’ 제정과 ‘목포시민 감사탑 건립’, 그리고 고하도 관광단지 개발 등을 추진하면서 많은 어려운 아이들과 장애인들을 정성스레 보살피고 있다.

이연 공생복지재단 상임이사는 “공생원은 윤치호. 윤학자 여사를 통해 꽃피운 기독교 성지이며, 목포 근대 역사문화 거리와 함께 일본인들이 더 큰 관심을 갖는 곳이다. 또한 공생원은 5천명의 고아들을 길러낸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역사로 공생원과 함께 마을 전체가 살아있는 근대역사 박물관이다”며 “이런 역사적 의미가 깊은 문화유적지인 목포를 전국과 세계에 알리고, 홍보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고 말했다.

 

[공생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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