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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21
[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21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8.07.27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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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장개석(蔣介石)의 고향 봉화(奉化)
봉화시는 영파시의 현급시로 장개석(蔣介石)의 고향으로 크고 부유한 집안이었다.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학량(張學良)이 장개석을 화청지 5간청에 감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서안사변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인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國共)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대일본전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공산당은 대장정으로 연안(延安)을 수도로 하여 동북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학량의 동북군은 고향인 만주를 일본에 빼앗긴 상태여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고, 공산당의 홍군(紅軍)과의 의미 없는 소모전이었다.

이곳에 장학량이 연금되었던 최초의 집이 있다. 장개석은 한이 맺혀, 그를 자기의 고향에 잡아 두고 있었다. 공산당에 쫓겨 대만으로 떠나기 전,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 일가친척들을 만나 헤어진 쓸쓸한 장면의 사진들이 걸려 있지만, 그의 생가를 중국정부가 잘 보존하고 있다.

설두산(雪窦山)
설두산은 한 마디로 말하면 장개석의 별장이다. 신선거와 설두산은 절강성을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신선거가 직선적인 바위들로 이뤄져 육중하고 단단한 느낌이 든다면, 설두산은 폭포와 계곡, 연못이 많아 좀더 푸근한 느낌을 준다. 설두산은 눈 설(雪), 구멍 두(窦)자를 쓰는데, 우유 빛의 맑은 샘물이 날마다 흘러나오는 구멍(窦)이라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설두산으로 위에서 아레로 3개의 커다란 폭포를 따라 내려가면 편안하다. 왕대나무 숲은 산중에 부는 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만으로도 시원하며, 천장암 폭포까지는 모노레일이 있어 아주 줄거운 코스다.

설두산의 진면목은 천장암(千丈岩) 폭포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200m가 조금 못 되는 폭포는 고개를 위로 완전히 쳐들어야만 아스라한 시작점이 보인다.

엄청난 속도로 하강하는 물길은 절벽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꽂힌다. 공중으로 흩어진 물방울들은 초록빛 연못 위에다 살포시 무지개를 걸어놓는다. 선녀들이 무지개를 어깨에 걸고 노닐 것 같은 환상적인 풍경을 나뭇꾼들이 보는 것 같은 풍경이다.

여요시는 봉화시와 마찬가지로 영파시에 속한 현급시이지만,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7천년의 하모도(河姆渡)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여요시에는 유명한 사상가 왕양명(王陽明), 세예가 우세남(虞世南)의 고향이다. 왕양명은 명나라시대 인물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인물로 원래 이름은 왕수인(王守仁)으로 무장 출신이다.

왕양명의 고택에 가 보았는데 아주 크고 호화로운 집이었다. 대학자는 가난한 집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 확실했다. 묘는 바로 옆의 소흥에 있다. 그의 집에 진삼불후(眞三不朽) 참으로 썩지 않는 3가지가 적혀 있다.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이다.

신라시대부터 교류가 활발했던 태주(台州)
태주는 원래 시소재지가 임해시에 있었다. 황암(黃岩)과 노교(路橋) 사이를 연결하는 도시로, 새로 건설되는 도시이다. 관광지로 이름난 천태현의 국청사나 석량(石梁)폭포, 삼문현(三門縣)의 우두외양(牛頭外洋), 신선거가 있는 곳이다.

태주를 가기 위해서는 항주공항에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공항에서 고속도로로 2시간 정도 달려가 아름다운 유도화(油桃花)가 많이 피어 있다. 시내에 성성공원은 잘 조성되어 있는데, 중앙의 호수와 분수대, 기다란 장랑(長廊) 그리고 대형 스크린 등이 어울린다. 태주는 항구도시로 강빈공원에서 밤 항구를 바라보면 긴 다리가 저녁 불빛에 찬란하고, 항구가 호수처럼 되어 있어 호수인지 바다인지를 분간하기 어렵다.

강빈공원 중앙에는 커다란 기념비가 있는데, ‘절강천리 해당기념비(浙江千里 海塘紀念碑)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태주는 ‘태주를 세계에 알리고, 태주는 세계로 나가자’ 라는 슬로건이다. 태주에 척계광(戚繼光)장군의 석상이 있다. 명나라 시대 왜구들이 쳐들어와 많은 중국인들을 살해했다. 태주는 표해록을 지은 최부선생과 연관이 있어 자매도시이다.

옛날에 태주를 동해왕국으로 불렀으며, 바로 앞의 바다가 동해이지만, 우리는 그 바다 이름을 동중국해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동해시와도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최부선생이 도착한 우두외양(牛頭外洋)
조선시대 나주 출신 최부(崔溥)선생이 1488년 제주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향하던 중 추자도 앞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가 1월 16일 삼문현 우두외양(牛頭外洋)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태주시와 나주시가 자매결연 맺은 도시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두외양’이 소머리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지금은 산봉우리를 밀어버리느라 한창 공사 중에 있었다. 우두외양에서 조금 나오면 절이 하나 있었는데, 최부선생이 이곳에서 첫날 밤을 지낸 곳이라고 비석이 세워져 있다.

지금도 그 절이 있고, 우리가 방문했을 때, 마을 주민들이 나와서 환영해주었다. 그리고 조금 가면 바위산에 구멍이 크게 뚫린 천암(穿岩)이 보인다. 그곳에도 최부선생이 바라본 천암이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최부선생 일행 43명이 상륙하자, 마을 사람들이 나와 왜구(倭寇)로 오인 받아 죽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왜구가 나타나면 먼저 죽이고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최부선생은 “나는 조선인이니 관청에 알려주라”고 말하자 바로 관청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조사과정에서 조선인임이 밝혀지자, 존경과 환대를 받게 되었다. 당시 왜구들은 어린애들을 대나무에 메달아 놓고, 뜨거운 물을 끼언저 죽이거나, 임신한 여자들을 아들인가 딸인가 내기해 산 사람의 배를 갈라 아이를 끄집어내는 짓을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최부선생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왜구로 몰릴 수 있었다.

최부선생은 태주를 출발하여 영파, 항주를 거쳐 북경에 도착하였을 때는 황제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으며, 북경을 출발하여 요양, 구련성을 거쳐 135일 만에 귀국하여, 중국 3대 기행문의 하나인 󰡐표해록(漂海錄)󰡑을 남겼다.

천태종의 발상지 국청사(國淸寺)
항주에서 소흥 가기 전의 농촌 풍경은 마치 도시와 같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집들이 2층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3층 4층 주택들이 우리나라 농촌에 있는 여관 건물 크기만 하다.

중국의 농촌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잘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혹 연변 지방의 농촌을 중국 농촌의 오늘의 모습으로 이해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전된 중국 농촌의 현실에 깜짝 놀라게 된다.

소흥을 지나 천태현에 들어가면 아주 한적한 시골 풍경이 나온다. 아직 경지 정리가 되지 않은 높은 산의 다락 논은 필리핀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과 비슷하다. 중국 어느 곳이나 개발의 붐이 많이 일고 있는데, 천태현 역시 도로를 내고 도시를 새롭게 건설하고 있다.

천태현에는 천태산과 국청사가 유명하다. 국청사는 서기 598년에 수나라가 때 세워진 절로 한국과 일본 불교의 천태종의 본산지이다. 국청사가 세워질 무렵 고구려 승려 바야(波若)는 남진(南陳) 시기 중국에 갔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금릉(金陵: 남경)을 떠나 천태산에 들어가 지의(智顗)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법을 전수 받았다.

그의 스승은 그에게 천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두타행(頭陀行)을 수련하도록 했다. 이에 바야가 산봉우리에서 16년간 수행한 다음 613년 자신의 수명이 다 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 하산하여 국청사로 내려갔다.

바야는 국청사에서 승려들과 하산 인사를 한 후 며칠이 지난 다음 아무런 통보도 없이 국청사에서 적멸(寂滅)하였다. 그는 천태종을 고구려에 전래시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행적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 의천은 1085년 31세에 문종과 인예왕후 몰래 송나라 상선을 타고 산동반도를 거쳐 국청사에 들어가 수도를 닦은 후 2년 만에 돌아와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오늘날 천태종의 사상과 이론은 바로 이 10년의 수선사 정진기간에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1500년 고찰 풍모 곳곳에 남아 수나라때 조성한 높이 59.3m의 6각 9층 탑. 하지만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선 수나라와 지키려는 진나라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워진 세상은 지의 대사가 입산수도에 전념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진나라 5대 왕 후주가 흔들리는 민심을 수습하고자 지의 대사에게 하산해서 법을 설해 줄 것을 간청하고 나선 것이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왕의 청을 물리치던 대사 역시 더 이상 간청을 내치지 못하고 결국 하산하여 금릉에 법석을 폈다.

이후 금릉을 떠나 여산, 남악, 형주, 양주 등지를 행각하다가 진나라가 멸망하고 수나라 제1대 왕 문제 개황 15년(595)에 이르러 다시 천태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산문을 나선지 1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수선사는 옛 모습을 잃은 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황폐화 돼 있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수선사 복원을 결심하고, 옛 자리에서 아래쪽으로 터를 옮겨 사찰 복원을 시작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입적 전까지 예전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이에 대사는 수양제에게 유서를 남기게 됐고, 대사 입적 후 수나라 2대왕 양제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복원불사가 마무리 됐다.

수양제가 직접 국청사라는 편액을 써서 하사함에 따라 국청사로 새롭게 산문을 열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며, 수대고찰(隋代古刹) 이란 글씨가 보인다.

천태산의 이름은 천제가 있는 높은 자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데서 유래하듯, 경관이 수려한 곳이라 왕희지나 이백, 서하객 등 수많은 유명인들이 다녀가면서 남긴 흔적이 적지 않다.

국청삼은(國淸三隱)은 당나라 때 이 절에 머물던 풍간선사라는 도인을 비롯해 한산과 습득 등 세 사람을 이르는 말로, 국청사에 숨어 산 세 성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 만큼 국청사에 전해지는 세 사람 이야기도 적지 않다.

어느 날 국청사에서 계를 설함에 수백 명의 대중이 법당에 앉아 법문을 듣고 있음에도 한산과 습득은 마구 떠들며 법당 앞을 지나다녔다. 결국 참지 못한 한 스님이 이들을 가로막자 한산이 “법당에 들어갈 종자가 따로 있는가?”라고 물었고, 습득은 “설법을 들을 종자인들 따로 있을라구”하면서 그를 조롱했다.

국청사 내에는 1,500년이 넘는 매화나무가 있다. 몇 차례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신비에 가까운 매화나무라고 한다. 국청사 바로 앞 하천에 비석이 하나 있다. 행도차수서류(行到此水西流)이다. 중국에서 거의 물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데, 이곳만은 동에서 서로 흐른다.

천태산으로 가는 길에 석량폭포(石樑瀑布)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말끔하게 다듬어진 길을 따라 30여분 숲속을 지나면 폭포가 나온다. 폭포에 도착하기만 하면 참으로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콩의 무술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폭포로 명나라시대 여행가 서하객(徐賀客)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경대선곡(瓊臺仙谷)이라는 유명한 관광지로 낭떠러지 절벽에 둑을 높이 만들었는데, 절벽과 폭포, 건물의 조화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2018년 7월 27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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