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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20
[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20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8.07.18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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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문화와 연결된 영파(寧波)
영파는 도시 곳곳에서 '작은 홍콩’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대륙의 홍콩이라는 영파는 항주만을 사이에 두고 상해와 마주보고 있는 항구도시이다. 당나라 때부터 항구였던 영파는 중국 송나라시대 최대의 무역항기도 했다.

지금은 상해에 밀렸지만 다시 부상하는 항구도시임에 분명하며. 현재 영파항의 물동량은 상해, 광주(廣州)에 이어 성장하고 있다. 영파항은 모두 4개 부두로 되어 있으며, 항구 부근에는 여객선 외에 작은 배가 드나들며 시장에는 해산물이 가득하다.

영파는 글자 그대로 편안할 녕(寧)에, 물결 파(波)자를 쓰는데, 파도도 잔잔하다는 뜻이다. 어원은 ‘해정즉파녕(海定則波寧: 바다가 안정되어 파도가 잔잔하다)’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옛날엔 이 항구를 통해 우리나라나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했다. 옛날 이름은 명주(明州)였는데 명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영파로 고쳤으나, 명주의 明자를 잊지 않기 위해 시내에 日湖와 月湖라는 호수가 있다.

月湖 바로 옆에 남송시대 고려 사신이 묵은 고려사관(高麗使館)이 옛날 모습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천일각 정원은 수많은 도서와 월극(越劇) 공연장, 마작(麻雀)이 처음 만들어진 곳으로 정원이 강남의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도가 잔잔하다는 뜻인 영파는 옛날엔 이 항구를 통해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였으며, 장보고대사가 왕래하였던 곳으로 신라방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송나라 서긍(徐兢)은 고려에 다녀간 후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책을 지어 황제에게 헌상하였고, 나주 출신 최부(崔溥)선생이 1488년 제주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 절강성 삼문현 우두외양(牛頭外洋)에 표착한 그림이 고려사관(高麗使館)에 그려져 있다.

송나라 시대 고려사관의 설치는 명주를 송 왕조의 중요 대외교류 창구로 만들어 놓았다. 그곳은 송나라가 주도하여 손님접대를 위해 건립한 행역관사(行驛館舍)이다. 접대 대상은 주로 고려의 사절단과 상인, 그리고 유학생 이외에 송 정부가 파견하는 고려 출사단으로, 외교와 무역의 기능을 갖춘 숙소이다.

강남지역에 유일했던 고려사관은 명주항의 존재와 관련이 깊다. 명주는 송초 이래로 중국과 한반도의 무역과 문화교류를 진행하였던 중요 항구였다. 고려 사절단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송 신종은 1079년 명주성에 동문관(同文館)을 두어 ‘낙빈(樂賓)’으로 고려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고 양국의 정치,경제,문화교류의 실제 수요에 만족해하였다. 1117년 송나라는 고려사관을 설립하였다.

고려사관은 1117년부터 1164년 최후의 고려사신을 맞을 때까지 고려사신은 57차례, 송사신은 30여 차례 왕래하였으며, 왕래 인원은 1차례 당 20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고려에서 가지고 온 조공품과 송의 답례품은 명주가 중심이 되었으며 고려사관에서 보관되었다. 이처럼 명주의 고려사관은 당시 공식적인 양국 항해 외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백제불교의 중심지 천동사(天童寺)
천동사(天童寺)라는 절은 고려 왕자 목연스님이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일본 스님들이 많이 다녀가고 있다. 2006년 5월 전남 영광에 최초 불교 도래지가 천동사로부터 들어온 행사를 하였다.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영광군 법성포를 통하여 인도승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불교를 최초로 전한 곳이다. 이에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한 간다라 양식의 야외박물관으로, 간다라광장과 108계단, 만불전, 부용루를 비롯하여 간다라유물관, 탑원, 사면대불상 등이 들어서 있고, 법성포(法聖浦)는 불교가 들어오는 포구라는 지명과, 불갑사(佛甲寺)라는 절이 있다.

천동사 입구에 들어가면, 입구가 멋있게 말들어져 있으며, 멀리 철불탑이 산중턱에 보인다. 입구에서 전동차를 타고 들어가는 고즈넉한 절이다. 다른 절처럼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관광객이 적지도 않는 아주 고풍스러운 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웅전이란 곳은 없고, 입구에 진(晉)나라 시대 사찰이란 글이 써 있으며, 천왕전과 불전(佛殿)이란 건물이 가장 크며, 뒤에서 장서루 등 많은 건물들이 즐비하였다. 불전 앞에 1250년이 되는 당백(唐柏)나무가 서있다.

천불탑으로 가는 길에 연못은 아름답고, 커다란 고목들의 가지들이 연못으로 모두 기울어져 있다. 주변으로 왕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그길을 따라 천불탑까지 올라갈 수 있다.

'신안선' 출발지..신라인 대거 유입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 등 200여명은 이듬해 귀국 뒤에 그 유명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약칭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지어 황제에게 헌상한다. 이에 의하면 서긍 일행이 고려를 향해 당시 송나라 수도 개봉(開封)을 출발한 것은 1123년 3월14일.

보통은 요동반도를 따라가는 육로를 택하지만 당시 금(金)이 한창 흥성하던 때라 해로를 이용했다. 이들을 태운 신주(神州)라는 배는 5월 26일 심가문(沈家門)을 출항해 6일 만에 소흑산도에 도착하고 서해 연안항로를 따라 계속 북상해 6월12일 예성항에 입항했다.

서긍 일행은 돌아갈 때는 역 코스를 밟았다. 그들의 출항지였고 귀항지였던 심가문은 지금의 중국 절강성 주산(舟山)시 보타구(普陀區)에 있다. 심지어 일본으로 가다가 신안 앞바다에 좌초한 '신안선'도 출항지는 영파였다. 하지만 영파의 이런 역사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덕왕 8년(816) 신라에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자 절동(浙東) 지역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들어간 신라인이 170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이듬해 10월에는 신라에서 당에 사신으로 보낸 김장렴(金張廉) 일행이 표류 끝에 영파에 도착했다고 한다.

나아가 신라 진성여왕 10년(896)에 작성된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의 비문에는 대사가 입절사(入浙使)인 최예희(崔藝熙)를 따라 입당하다가 표류 끝에 영파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들에 나오는 절동은 지금의 영파를 중심으로 하는 절강성 동해안 일대다. 이는 그만큼 이 무렵에 영파를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절강성 일대가 두 지역 문화교류의 창구였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중당(中唐) 시대를 대표하는 대시인 백락천이 생전에 펴낸 시집인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서문에 의하면 백락천 시집을 구입한 신라상인이 영파항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영파 인근 주산에는 중국 4대 불교 성지 중 하나로 관음 신앙의 발상지로 간주되는 보타산이란 곳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에서 비롯된 보타산 관음신앙은 그대로 신라로 유입되어 의상대사가 지금의 강원도 양양에 역시 같은 관음신앙의 본거지인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2018년 7월 17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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