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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19
[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19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8.07.13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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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월(越)나의 역사가 있는 소흥(紹興)

항주에서 남동쪽으로 60km 떨어진 소흥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이다. 월왕의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싸워 진 곳으로 회계지치(會稽之恥)로 유명하며, 이것을 가슴 속에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킨 고사가 유래된 곳이다.

이곳은 중국 4대 미녀의 한 사람인 서시(西施)의 고향이기도 하다. 소흥의 현급시인 제기시에서 태어났는데, 아직도 그녀가 빨래하던 터에 완사석(浣紗石)이 있다. 나주시청 앞에 왕비인 나주오씨가 왕건에게 물을 건너 준 완사천이 있다.

소흥은 중국의 8대 명주에 속하는 소흥주가 생산되는 곳인데, 소흥주는 24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황주(黃酒)이다. 소흥주는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서시와 함께 선물로 준 술이기도 하다.

소흥은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 노신(魯迅)의 고향이기도 하며, 1898년 태어났다. '아큐정전'은 세계적인 명작으로 그의 대표작이다. 이외에도 공을기(孔乙己),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의 작품을 남겼다.

시내에는 노신 기념관이 있으며, 기념관 안에는 원고와 편지 등 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소흥에는 소흥주 이외에도 노신의 작품 ‘공을기’란 이름을 딴 술이 있다.

아큐정전은 1921년부터 북경의 신보(晨報) 부록 판에 연재되었다가, 1923년에 제 1단편집 ‘눌함’에 수록되었다. 신해혁명을 전후한 농촌을 배경으로, 정확한 성명도 모르는 최하층의 날품팔이 농민인 '아큐의 전기'라는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혁명당원을 자처했으나 도둑으로 몰려서 싱겁게 총살되어 죽는 ‘아큐의 운명’을, 혁명 앞에서도 끄떡없는 권력을 가지고 마을에 군림하는 지주 조가를 통해 신해혁명의 좌절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모욕을 받아도 저항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머리속에서 정신적 승리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아큐의 정신구조를 희화화(戱畵化)함으로써 철저히 파헤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사람들이 노신 자신을 모델로 하여 쓴 작품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중국 구사회의 병든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후 이 작품에 대해서 심한 비판이 있었으나, 중국 근대문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소흥에 우릉(禹陵)이 있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시조 우임금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 임금은 치수의 영웅으로, 당시 강(江)의 범람을 염려하던 순(舜) 임금이 자신의 아들 대신 우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중국은 하(夏)나라 우(禹) 임금부터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전통이 생겼다.

우리나라 장흥 임씨(任氏)의 시조 임호선생이 이곳으로부터 들어와 공예태후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장흥군 관산읍에 가면 장흥임씨 사당인 정안사와 소흥문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왕희지(王羲之)의 난정(蘭亭)

소흥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난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은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가 353년에 41명의 명사들과 함께 유상곡수(流觴曲水)에서 잔이 한 바퀴 돌 때까지 시연회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고대의 풍류 가운데 흐르는 물에다 술잔을 띄워 보내면 그 술잔을 받은 사람마다 시를 지어 화답하는 놀이가 유상곡수이다. 경주의 포석정이 그러한 유상곡수의 풍류가 행해졌던 유적이 남아 있다.

대개 이 유상곡수의 풍류는 음력 3월 3일에 많이 행해졌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둘러앉아 물에다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둥둥 떠서 자기 앞에 온다. 물이 곡수(曲水)로 굽어서 돌기 때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앞에 머물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에 둥둥 떠오는 술잔을 받는다는 것은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흐르는 물가에서 이 놀이를 하는 이유는 상서롭지 못한 액운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서예를 하는 사람 치고 󰡐난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유명한 필첩이 난정기인 것이다. 왕희지 글씨의 모든 요체가 여기에 들어 있다. 왕희지는 거위를 특히 좋아하여, 거위 한 마리를 가져온 사람에게 글씨 한 폭씩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거위를 길렀다는 장소인 아지(鵝池)가 있다. 아지의 아(鵞)자는 왕희자 쓰고, 지(池)자는 그의 아들 왕헌지가 썼다고 전한다. 아는 가늘게 섰으며, 지는 굵게 써있다.

중국 서예의 역사에서 왕희지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무게는 헤아릴 수 없다. 해서와 행서, 초서 등 대표적으로 꼽히는 세 종류의 서체를 완성해 중국의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결혼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동진을 건국하는 데 공이 컸던 왕도는 그의 백부(伯父)다. 승상을 맡고 있던 왕도에게 당시 태부(太傅)의 직에 있던 치감이라는 권세가가 혼사를 거론했다. 왕도의 조카들 중에서 사위를 고르고 싶다는 얘기였다.

왕도는 직접 사람을 보내 고르라는 대답을 하자, 며칠 뒤 치감은 자신의 수하를 보내 사윗감을 물색했다. 왕희지의 형제들과 사촌들은 몸을 단장하고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 이리저리 모여 앉아 토론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단 왕희지는 침상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으면서, 누가 왔는지 전혀 신경을 안 쓰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 위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필체를 가다듬는 연습 중이었던 셈이었다.

치감은 결국 배를 드러내 놓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왕희지를 사위로 선택했다. ‘집안 자제들이 머무르는 동쪽 건물의 침상에서 배를 내놓은 사람’이라는 뜻의 ‘탄복동상(坦腹東床)’은 그에 관한 성어로, 지금은 훌륭한 사위라는 뜻으로 쓰인다.

왕희지(307년 ~ 365년)는 중국 동진 시대의 서예가로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다. 서성(書聖)이라고 불리운다.

산둥성 임기(臨沂) 사람으로, 동진을 만드는데 공을 세운 왕도의 조카이고, 아버지는 왕광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한나라나 위나라의 비문을 보고 스스로 배우면서 계속하였다.

나중에는 벼슬 길에도 나아가 비서랑으로부터 출발하여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의 내사에 이르렀다. 세상을 살펴보는 눈도 있어서 북벌을 요청하기도 했고 재상 사안에게 민간의 정치를 논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에서 친구들과 청담을 나누고, 도교에도 관심이 있어 유유자적하면서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의 업적은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서예를 단순히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2018년 7월 12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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