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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우리나라 정치무대를 주름잡아온 3김과의 만남
반세기 우리나라 정치무대를 주름잡아온 3김과의 만남
  • 광주일등뉴스
  • 승인 2010.10.0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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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하 전 전남매일 편집국장 정치 격변기 앞두고 회고

 이른바 3김(金)이라 불린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김종필(金鍾泌) 씨는 반세기 우리나라 정치무대를 주름잡아온 지도자라 해도 부인할 국민은 없으리라 본다.

 

박주하 전 전남매일 편집국장
이미 김영삼 씨가 제 14대, 김대중 씨가 15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김종필 씨가 자민련(自由民主聯合) 총재 등을 맡아 당시 그들의 쟁쟁한 역할은 아직도 우리의 뇌리를 스치고 있다.

  일간지 일선 취재기자를 오래했던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할 기회가 많았었는데 그중에서도 잊히지 않고 기억에 남는 인사가 바로 이들 3김이다. 가까이서 본 이들은 역시 지도자다운 면면이 나름대로 역력했으며 한편으로는 엄숙함을 넘어 다정다감한 이웃집 아저씨요 큰 형님 같은 믿음직한 모습이어서 한결 깊은 정을 느끼게 했다.

 3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는 그동안 매스컴 등을 통해 많이 알려져 왔다. 따라서 나는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그들을 만나게 된 동기와 그때 있었던 일들만을 밝혀 볼까 한다.

#김대중 총재와의 간담회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지난 69년부터다. 당시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나는 전남매일신문사(全南每日新聞社) 사회부차장(社會部次長)이었고 그는 신민당(新民黨) 목포(木浦)지구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그가 연하장을 보내오면서 마음에 새기게 된 계기가 됐다.

 그 후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그의 활약상을 보도 등을 통해 수시 접했고 사선을 넘나드는 그의 불행한 운명에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을 최초 곁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전남매일 정치부장으로 전남도청 출입기자 때인 1989년 7월 28일이었다. 평민당(平民黨) 총재이던 그가 3일전인 25일의 엄청난 폭우에 피해를 입은 광주 전남 이재민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내광(來光)해 전남도청 재해대책본부서 피해상황을 브리핑 받는 자리에서다.

 송언종(宋彦鍾) 전남도지사가 설명을 하고 있었고, 미처 사진기자를 부르지 못한 나는 마침 새로 샀던 카메라를 가지고 있어서 셔터를 마구 누르며 돌아 다녔다. 브리핑 하고 있는 송 지사는 물론 앞자리에 앉아 있는 김 총재 자리까지 접근해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아마 서울서 내려온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느 신문사의 장비가 초라한 사진기자쯤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때 카메라가 MINOLTA로 가로 13㎝, 세로 6㎝ 정도의 크기였는데 23만원 주고 구입한지 한 달이 채 안됐었다.

 그러던 그와의 깊은 인연은 내가 전남매일신문사 편집국장(編輯局長)으로 재직 중이던 1991년 11월 13일 저녁에 이뤄졌다.

 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실패하고 92년 제14대 대선을 1년 남겨두고 광주에 내려온 그는 이날 저녁 전남매일 편집국장인 나를 비롯 광주일보, 전남일보, 무등일보, 광주매일 편집국장 등 5개 지방신문 편집국장과 KBS광주방송총국, MBC광주문화방송, CBS광주기독교방송 등 3개 방송국 보도국장 등 8개 신문 방송 편집국장 보도국장을 초청해 동구 금동에 있는 ‘송죽헌’에서 간담회 겸 저녁 먹는 자리를 마련했다.

 민주당(民主黨)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은 이날 김원기(金元基) 원내총무를 비롯 광주출신 국회의원인 신기하(辛基夏), 조홍규(趙洪奎), 정웅(鄭雄)의원과 전남의 김영진(金泳鎭) 의원 등을 대거 대동하고 우리들과 마주했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현안문제에 대한 설명은 김원기 총무가 도맡아 했고 김 공동대표가 보충설명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다른 의원들은 끝날 때까지 한마디 발언도 없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담배는 김 공동대표 앞에서 감히 피우지도 못했으며 술기운이 있었는데도 부동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석도 없었다. 다만 신기하 의원과 조홍규 의원만이 가끔 이 자리, 저 자리를 옮겨 다니며 이사람 저사람에게 말을 걸곤 했다. 김 공동대표의 카리스마가 엿보이는 듯 했다.

 간담회가 끝나고 나오는데 신기하 의원이 봉투 하나씩을 줬다. 나중에 꺼내 보니 그 속에 ‘공화국연합제’(金大中 지음)란 책 1권과 ‘行動하는 良心으로, 民主黨 共同代表 金大中’의 글씨가 새겨진 만년필처럼 생긴 검정색 볼펜이 들어 있었다.

 이날 저녁 간담회 내용은 우리 전남매일신문의 경우 내가 직접 기사를 써 14일자 1면 톱으로 보도됐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金大中 民主黨공동대표는 13일 밤 이 지역 중견언론인들과의 간담회에서 “지난 87년 大選 때 투표에는 이기고 개표에서 비운을 맛봤다”며 “내년 14代총선에서 꼭 승리한 후 국민과 黨이 원하면 다시 한 번 大權에 도전하겠다”고 밝혀 차기 大權에 대한 도전 의사를 강력히 시사했다. 

 金대표는 또 湖南지역 현역의원 물갈이 論으로 정치권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14代 공천문제와 관련 “참신하고 깨끗한 젊은 인재와 예비역 군 장성 그리고 중견언론인 등 각계각층의 유능한 인재를 대거 영입해 당 체질을 개혁할 것”이라고 말해 湖南지역 현역의원들의 대폭 물갈이가 예상되고 있다.

 金대표는 이어 “현재 공천까지는 시간이 남아있는 만큼 지역주민의 의견수렴을 위해 금명간 각지역구별로 조사단을 구성, 파견하겠다”고 말해 주민이 원하는 후보를 공천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金대표는 또 지역감정 문제와 관련 “지역감정은 지역민들의 책임이 아니라 이를 조장, 방조한 집권자들의 책임”이라며 “현재 우리국민 모두가 망국적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만큼 빠른 시일 내에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또한 金대표는 “세계정세와 주변상황에 비추어 볼 때 오는 95年까지는 南北통일 실현가능성이 높다”고 내다 봤다.

 최근 여권 내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부통령제 신설과 관련, 金대표는 “부통령제는 시기상조”라며 “여권은 현재 TK對 非TK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궁여지책으로 내각제 개헌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金대표는 추곡수매와 관련 “黨차원의 거국적 투쟁에도 불구, 정부․여당은 7%인상과 통일벼 수매동결을 결정했다”면서 “국회추곡수매량 동의과정에서 물가 상승률을 감안, 당운을 걸고 두 자리 수 인상과 전량수매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삼 총재 단독 인터뷰

 김영삼 총재를 단독 인터뷰할 수 있었던 기회는 그가 민주당총재(民主黨總裁)로 있던 1989년 7월 30일 오전 9시 광주 '신양파크호텔'에서다.

 내광 목적은 광주 전남지역 수재민 위로격려였고 나는 전남매일(全南每日) 정치부장(政治部長)으로 전남도청 출입기자 때였다.

 당시 지역감정 등 정치적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상당히 냉대를 받아온 그는 이번 방문 역시 별다른 환영을 받지 못한 채 일정대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더욱이 일부 주요 신문 방송들도 그의 방문 기사를 한 줄도 취급하지 않은 그런 상태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야당총수로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온 그가 과연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들어보고 싶었고, 또 언젠가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가정할 때, 그 때의 대통령 단독 인터뷰란 상상도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어서 이런 기회에 한번 인터뷰해 둔 것도 지방지 기자로서는 큰 영광이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날 김 총재는 전날인 29일 나주(羅州) 수해지구와 30일 오전 6시 30분 망월동(望月洞) 5.18 광주민중항쟁 희생자 묘역을 참배하고 미리 약속된 나와의 단독 인터뷰를 위해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었다.

 수행원의 안내를 받아 김 총재가 하루 밤을 묵은 호텔방에서 만났다. 언제나 동안(童顔)인 그는 이날도 밝은 얼굴에 산행(登山)으로 단련된 살이 찌지 않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그런 모습이었다.

 인터뷰 내용은 수해참상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내광 목적이 ‘수재민 위로격려’인데다 시간에 쫓기어 정치 등 그 이외의 어떤 문제도 심층취재를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곧 안광양(安光洋) 전남매일신문사 사장과의 면담자리를 주선해야 했고, 여기서 있었던 환담내용만을 기사화해야 했다.

 김 총재와의 인터뷰 기사는 31일자 1면 정치면에 김 총재와 안 사장이 나란히 찍은 2단 흑백사진(5×8.3㎝)과 함께 ‘항구 復舊에 黨力 집중할 터’ ‘金 民主총재 安 本社사장에 다짐’ ‘水害地시찰, 望月洞참배’라는 제목에 횡으로 보도됐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全南지방 수해지구를 돌아본 金泳三 民主黨총재는 30일 “엄청난 피해에 어떻게 수재민을 위로해야할지 모르겠다”면서 “이는 개인문제도 아니고 전체국민이 내일이라고 생각, 복구 작업에 나서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9시 숙소인 光州 ‘신양파크호텔’에서 安光洋 全南每日新聞社 社長과 단독으로 만나 이같이 밝힌 金총재는 “국회에서 피해복구예산은 물론 항구적인 복구사업을 벌이도록 당력을 집중하겠다”고 약속하고 “釜山이나 嶺南지방으로 먼저 가야하지만 이곳이 피해를 많이 입었고 지난번 大統領선거 이후 한 번도 찾아오지 못했기에 내려왔다”면서 “수해참상이 생각 이상이어서 가슴이 몹시 아프다”고 말했다. 

지난 87년 말 大統領후보로 유세차 光州를 다녀간 후 1년 8개월만에 방문했는데 “그때는 진로를 막고 방해를 많이 받았으나 이번에는 환호와 열렬한 박수로 맞아줘 정말 흐믓했다”고 全南도민의 따뜻한 영접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29일 내려온 金총재는 이날 오후 羅州 수해지구를 들러본 후 30일 아침 6시 30분 望月동 5.18희생자 묘역을 참배 헌화한데 이어 光州시 光山구와 長城지방을 둘러보고 慶南지방으로 떠났다.》

 김총재의 전남지방 수해현장 방문기사는 오직 위 내용의 전남매일신문 뿐이어서 당시 민주당에서는 우리 신문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바라봤다. 신문이 발행되자 몇 부를 서울 당사로 우송했으나 金총재가 직접 읽어 보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후 돌아온 추석에 김총재 이름으로 양주 한 병이 나에게 보내져와 “그래도 고맙게 생각했는 모양”이라고 혼자 짐작만 했다.

 당시 전남지방에는 7월 24일 밤부터 연 3일째 폭우가 쏟아져 인명피해 1백여명(사망 실종 59명, 부상 46명)과 가옥파괴 침수 2만7천여동, 농경지 침수 매몰 4만여정보, 이재민 4만여명이 발생했다. 가장 비가 많이 내렸던 곳은 나주지방의 4백32밀리가 최고였는데 그것도 25일 오전의 경우 물동이로 쏟아 붓듯 한꺼번에 내려 큰 피해를 입었다.

 김 총재와의 만남은 그 후 제14대 대통령선거유세 때인 92년 11월 4일 나주에서 또 한 차례 있었다. 여기서는 단독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순차적으로 악수하면서 이뤄졌다.

 이때는 내가 전남매일신문사를 그만 두고 ‘서해안시대준비위원회 홍보국장’을 맡고 있을 무렵이다. 이 기구는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의 사조직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이 운동에 열성이던 친구를 방문했다가 그와 주변사람들의 간곡한 권유에 이끌려 참여하게 됐었다.

 이날의 만남은 여당인 민자당(民主自由黨) 대통령후보인 김 후보가 나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4대 대선필승 광주․전남 당원결의대회’ 및 ‘광주․전남 청년봉사단 발대식’에 참석 연설을 마치고 점심을 먹게 된 식당에서다.

 먼저 도착한 우리에게 다가온 김 후보가 한사람씩 악수를 하는데 나의 차례가 돼 악수를 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전남매일신문사 편집국장을 지냈던 박주하 씨 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이 말을 들은 김 후보는 어렴풋이 단독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나는지 반갑게 내 손을 잡았지만 정확히 알아보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김 후보는 그 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돼 다음해인 93년 2월 25일 취임식을 갖고 5년 동안 집권했다. 그러나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기회는 단독 인터뷰 때 예상했던 대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김종필 총재와의 만남

 김종필 공화당총재(共和黨總裁)를 만난 것은 1989년 7월 31일 광주시청 앞 금수장호텔에서다. 김 총재 역시 25일 발생한 전남지방 수해지구를 둘러보고 이재민을 위로격려하기 위해 내려왔다가 이날 일정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 호텔에 도착했었다.

 이때 나는 전남매일신문 정치부장으로 전남도청 출입기자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 초청돼 참석하게 됐다.

 김 총재에 대해서는 유독 정이 가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김 총재와 나의 장형이 육사 8기 동기생이기 때문이다.

 맥주잔이 돌려지고 대화가 잠간 뜸한 사이 특별히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기회를 엿보던 나는 잔을 들고 김 총재 식탁 앞으로 다가가    “총재님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하며 잔을 권했다.

 이때 옆자리의 누군가가   “전남매일신문사 정치부장”이라며 나를 소개했다.

 나는 그 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총재님, 제가 총재님과 육사 8기 동기생인 (아무개)의 동생입니다”
했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한참을 쳐다보다가   “형님보다 눈썹이 더 진하구먼”  하는 것이었다.

 이 한마디가 ‘형님을 잘 알고 있으며 그 동생이라니 반갑다’는 말을 대신한 것으로 보였다. 역시 능숙한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닮아서 인지 눈썹이 유독 숱이 많고 진하다. 특히 나의 경우 카이제르(kaiser) 같은 눈썹이어서 ‘장군 눈썹’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오직했으면 “영양분이 전부 눈썹으로만 간 모양”이라고 했을까. 요즘은 너무 길어 가위로 다듬고 다닌다.

 점심을 마친 김 총재 일행은 이날 오후 광주공항에서 특별기편으로 상경했다.  그런데 공항에서의 일이다. 귀빈실에서 환담을 나눈 후 비행기를 타기 위해 비행기까지 걸어가는데 김 총재가 다른 환송객을 제쳐 두고 나의 어깨를 오른팔로 껴안고 걸어가는 것이다. 모든 환송객이 의아해 하고 그러면서도 부럽다는 듯 쳐다보았음은 물론이다. 이래 저래서인지 그에게 정이 많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김 총재에 대한 기사는 다음날인 8월 1일자 1면에 안광양 본사 사장과의 환담장면 2단 흑백사진(5×8㎝)과 함께 횡으로 보도됐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金鍾泌 共和黨총재는 31일 李熺逸 종합기획실장, 金仁坤 光州․全南 시도지부위원장, 李麟求 忠南도당위원장, 金文元 원내대변인 등을 대동, 光州․全南도 재해대책본부에 들러 수해현황 및 대책을 보고받은 후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피해가 극심했던 長城읍 鈴泉l.2구를 둘러봤다. 金총재는 전날 西歸浦 KAL호텔에서 열린 全經聯주최 최고경영자 세미나에 참석, ‘선진한국을 위한 정치인의 역할과 자세‘라는 연설을 한 후 이날 光州에 도착, 차례로 대책본부를 방문하고 수해의연금과 격려금을 전달했다.

이날 오후 서울로 떠나기에 앞서 본사 안광양 사장과 만난 김 총재는 “수해지구를 돌아보니 그 참상이 너무 엄청나더라”라고 말하고 “항구적인 복구를 위해 국회에서 당력을 집중, 적극 지원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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