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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칼럼]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17
[강원구 칼럼]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17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8.06.20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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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靈隱寺)와 고려사(高麗寺)

영은사는 중국의 선종(禪宗) 10대 사찰중의 하나다. 아름다운 서호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져 있는 북고봉의 남쪽 기슭에 있다. 동진시대 인도의 승려 혜리(慧理)가 창시했으며, 오나라 때는 9루, 18각, 72전에 3천여 명의 승려가 있는 커다란 절이었다.

입구 앞에 '지척서천(咫尺西天)'이란 글씨가 크게 써있는데 ‘극락이 지척에 있다’는 뜻이다. 입구 정문에 영은사(靈隱寺)란 강택민 전 주석의 글씨가 걸려 있다. 바로 앞에 비래봉이란 동굴이 나오는데 동굴 속에 338개의 부처들이 조각되어 있다. 모든 것이 신비에 가까울 정도로 잘 조각되어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많이 파손되었다.

영은사에는 영은사라는 글자가 없고, 운림선사(雲林禪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것은 청나라 강희황제가 친히 영은사를 쓰려다가 비 우(雨)자를 너무 크게 써 령(靈)자를 못 쓰고 운(雲)자로 쓰면서 운림선사로 했다는 일설이 있다. 대웅전내에 황금색으로 만들어진 석가모니좌상이 있는데, 자그마치 19.6m나 되며, 대웅전의 높이는 33.6m에 이르는 웅장한 건물이다.

석가모니 상 뒤편으로 많은 불상들이 모셔져 있는 오백나한당에는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불상이 있다. 다름 아닌 신라시대 김교각스님인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김교각스님은 신라의 성덕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왕위를 버리고 중국 안휘성 구화산으로 들어가 수도를 했다.

719년 그의 나이 24세에 중국에 들어와서 99세까지 살아 그가 죽은 후 3년 동안 시신이 썩지 않아 등신불을 만들어 지장보살로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7월 30일 탄생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오백나한을 모시는 건물에 500명의 유명한 승려들이 잘 모셔져 있다. 김교각 스님의 상이 가장 가운데, 그리고 가장 크게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스님을 얼마나 존경했는가를 알 수 있다. 또 한명의 왕자인 455번 째 무상스님이 있다.

고려시대 있었던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에 ‘고려사(高麗寺)’터가 있었다. 지금은 항주시 정부가 많은 돈을 들여 고려사를 완공하였고, 대각국사 의천(義天)을 모시고 있어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고려시대 코리아타운과 같은 곳이었다.

전당강과 육화탑(六和塔)

항주의 전당강에서 시작하여 북경까지 이어지는 경항대운하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전당강을 바라보면 웅장한 전당대교가 보이는데, 이 다리는 중국자본으로 처음 만든 다리로 자동차와 기차가 다닐 수 있는 2층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해방 전에는 중국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전당강 옆에 육화탑이 있는데, 육화(六和)란 동서남북(東西南北)과 상하(上下)를 나타낸다. 육화탑은 항주의 월윤산에 있는 탑으로 겉보기에는 13층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7층짜리 8각탑으로 높이가 약 60m이다.

육화탑은 전당강의 역류(逆流)를 막기 위해 오월국의 전홍숙(錢弘叔)이 건립한 탑이다. 육화탑 뒤에는 전국의 유명한 탑들만 모아 둔 탑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탑 안의 가파른 계단이 있는데 위로 올라가 바로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전당강을 바라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짐을 싣고 가는 배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전당강은 매년 음력 8월 18일 전후하여 바다 밀물의 대역류가 이루어진다. 전당강의 입구인 항주만은 깔대기 모양처럼 되어 있다. 그래서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이곳 전당강에 이르면 100km 입구에서 갑자기 2km로 좁아지기 때문에 파도가 높고 거칠어 파도가 8m까지 이르기도 한다.

전당강이 있는 지역을 ‘절강성’이라 부른다. 전당강을 일명 ‘절강’ 또는 ‘지강’이라 부른다. 그것은 이 강이 갈지(之)자 모양과 같다고 해서 지강(之江)이라 부르며, 물이 꺾이다(折)에서 절(浙) 또는 제(淛)라 하여, ‘절강(浙江)’이라 부른다. 전당강은 돈 전, 둑 당, 가람 강이다. 동한(東漢)시대 화신(華信)이 돈을 주어 둑을 쌓았다고 해서 전당강(錢塘江)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전당강과 압록강의 고사가 있는 용비어천가 67장을 보면

'가람(江) 가에 자거늘 밀물이 사흘이로되 나가서야 잠겼습니다.
섬 안에 자실 제 홍수가 사흘이로되 비어서야 잠겼습니다'..

원나라 승상 백안(伯顔)이 송나라와 전쟁할 때 전당강의 대역류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전당강 밑에 진을 치게 되었는데, 송나라 병사들은 하룻밤만 지나면 원나라의 병사들이 밀물에 휩쓸려 죽을 것으로 알았으나, 사흘 동안 대역류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말한다.

또한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위화도에 머물렀을 때도 큰비가 사흘 동안 퍼부었으나 이성계의 정벌군이 회군한 후 섬이 물속에 잠겼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면 백안이나 이성계는 하늘이 도와준 천우신조(天佑神助)라는 것이 용비어천가의 내용이다.

충신 악비(岳飛) 사당인 악왕묘(岳王廟)

은허(殷墟) 유적지인 하남성 안양시 부근에 탕음현(湯陰縣)이 있다. 탕음현은 원래 남송시대 악비장군의 고향으로 유명해서 사당인 악비묘가 있다. 1129년 여진족의 금나라가 남하했을 때 강경주전론을 펼쳤던 인물이 악비이다. 악비의 대립에는 온건주화론을 펼쳤던 진회(秦檜)가 있었다.

송사(宋史) 악비 열전에 평가하기를 ‘악비와 진회의 세력은 양립할 수 없었다’ 면서 ‘제갈공명의 풍모가 있던 악비는 진회에 의해 죽고 말았다‘ 라고 적고 있다. 당시에도 두 노선 중 어느 것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악비 사후 300여 년 후에도 악비를 한족의 민족영웅으로 떠오르게 했다.

악비는 제갈공명과 더불어 충절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중국인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관우와 함께 군신(軍神)으로 숭배되기까지 한다. 실제로 그는 금나라 군대를 맞아 연전연승을 거뒀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 인기가 드높았다.

하지만 강남으로 달아나 항주를 임시 도읍으로 삼고 있던 송의 귀족들은 악비가 눈엣가시 같았다.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서호의 풍광이나 즐기며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게 그들의 바람이었던 까닭이다. 진회는 가짜 성지를 만들어 악비의 병권을 빼앗고 소환해 죽였다.

결국 송은 굴욕적 화친조약을 맺고 금의 속국이 됐다. 나중에 무장 한세충이 진회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물었다. "도대체 악비에게 무슨 죄가 있었던 것이오?" 이때 진회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럴 만한 일이 아마도 있었을 것이오(其事體莫須有)."

악비는 나중에 복권돼 악왕(顎王)으로 추존됐다. 하지만 진회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간신으로 등극한다. 항주에 사당과 묘가 있다. 1221년에 건립된 이 사당 안에 높이 4.5m의 악비 좌상이 있고, 대전 밖의 정원에는 악비 부자의 묘가 있다. 장군의 무덤 앞에는 손이 뒤로하고 포승줄로 묶여서 무릎을 꿇고 있는 4개 철상 이 있는데, 이것은 악비를 투옥하고 독살한 투항파의 간신 진회 부부와 그들의 심복이다.

관람객들이 진회 부부의 철상에 침을 뱉거나 때리는 사람들이 있어, '침을 뱉지 말 것'이라는 푯말이 붙여 놓았다. 이 철상은 국보에 해당하는 전국 중점 문물보호 단위로 지정하였다. 청나라 건륭황제 때 과거에 장원급제한 진간천은 “송나라 이후 사람들은 ‘회(檜)’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고, 나는 ’진(秦)‘이라는 성에 참담해하는구나”라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 그는 진회의 후손이었다.

간신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엄정하다. 그럼에도 간신은 끊임없이 등장해 군주를 포악하게 만들고, 충신을 모함하며, 조정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해 나라를 팔아먹기도 한다.

2003년에 들어서 중국의 사학계가 역사적 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놓고 돌연 찬반양론이 분분하다. 그 동안 민족적 영웅으로 평가 받아온 악비가 전혀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역사 교육 당국의 전격 발표가 최근 나오자 대학에 재직중인 현장의 학자들이 이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더구나 중국 사학계의 태두인 대일(戴逸)박사와 중국 송사(宋史)연구회의 왕증유(王曾瑜) 회장 등은 어떻게 교육 당국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고 하면서 분노의 입장까지 표명함에 따라 중국 사학계는 갑작스레 심각한 분열양상 마저 보이고 있다.

중국인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악비는 송대에 여진족이 세운 금과 투쟁하다 장렬하게 희생된 인물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 역사 교육 당국이 외세가 아닌 민족 내부 간의 모순에 저항해 싸운 영웅들은 민족 영웅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악비가 갑자기 평범한 인물로 내몰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 중화민족의 개념에 한족 외에 몽골․만주 등도 모두 포함된다고 재규정하다 보니 만주족과 싸운 악비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데 논리적 모순이 생겼다.

구국의 영웅, 악비(岳飛)는 왜 추락하고 있는가?

북방의 여진족 금(金)나라에 수도 개봉(開封)을 함락당하고 남쪽으로 도망해 겨우 살아남은 남송(南宋) 왕조에서 끝까지 무력 투쟁을 주장하며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악비(岳飛, 1103~1142). 이런 그를 일반 중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사가들도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이런 역사 인식은 1980년대 이후 중국이 '다민족국가론'을 공식 채택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2009년도 동북아역사재단의 공동연구과제의 결과물로 최근 단행본으로 발간된 '동북아 중세의 한족과 북방민족'에서 악비에 대한 역사평가가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달라졌는지를 점검했다.

이런 변화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가가 장박천(張博泉)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금나라 역사에 대한 각종 논문과 저서를 쏟아낸 그는 '중화일체론'에 따라 금나라 역사 또한 중국 국내사의 일부로 파악했다.

그는 중화(中華)를 귀하게 여기고 이적(夷狄)을 천하게 보는 차별의식을 '봉건적'이라고 비판한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런 역사의식을 '반동적 민족분열사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장박천에게 송(宋)과 금(金)나라의 대립은 중국과 이민족의 대립이 아니라, 중국 내부의 대립인 내전이 되며 악비가 중국 민족을 구한 영웅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가 악비를 폄훼하지는 않았다. 그는 금나라 진영에서 강경파 주전(主戰) 인물인 김올출(金兀朮, 아골타의 4째 아들)과 악비(岳飛)를 한데 묶어 두 왕조 투쟁에서 모두 자신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중화민족 역사상 칭찬할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다만 구국의 영웅에서는 한발 물러난 셈이다.

중국 역사학계에서 1950년대 이래 막강한 위세를 누린 유물사관이 퇴색하고 중국 역사 주체가 한족이 아니라 55개 소수민족을 포함한 중화민족 '다원일체론'에 근거한 '애국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한 점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았다.

악비의 사당이 있는 항주에서 1988년 1집이 나온 '악비연구'(岳飛硏究)의 경우 1996년까지 발행된 제4집까지만 해도 악비를 민족영웅으로 인식하는 논문이 절대다수였지만, 이후 중국 당국의 다민족일체론이 강화되면서 학술지 자체가 거의 10년 동안 발행이 중단됐는가 하면, 이후 논문집에는 아예 악비를 다룬 논문 자체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원로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악비를 여전히 구국의 영웅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존재하지만 악비의 위상에 많은 변화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악비가 쓴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는 사천성 성도(成都)의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입구에 커다랗게 쓰여져 있다.

2018년 6월 20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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