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03-28 16:47 (목)
[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14
[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14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8.05.23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신 장군의 회안(淮安)
한신 장군은 소년 시절 의지할 데 없는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그가 어려울 때 마을의 건달 하나가 시장 바닥에서 한신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는 “야 이놈아! 몸뚱이만 커가지고, 칼을 차고 있으면 다냐. 속은 겁쟁이면서”하며 모욕을 주었다. 그리고 “용기가 있으면 나를 찔러봐. 그럴 용기가 없으면 내 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라.”고 놀려댔다.

한신이 그를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엎드려 그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갔다. 시장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는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한나라 최고 장군이 되어 고향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하였는데, 그에게 모욕을 주었던 건달은 한신이 온다는 소식에 벌벌 떨었다.

그가 한신 장군 앞에 끌려왔으나, 한신은 “내가 그때 너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너를 죽이면 내가 살인자가 되어 도망 다녀야 하므로 내가 이루려는 꿈을 못 이루기 때문에 참았다”고 말하며, 벌을 받을까 떨고 있는 그를 안심시킨 후 동네 치안을 담당하는 직책에 임명하였다.

<손자병법>에 이르길 ‘적의 실력을 알아내거나, 이길 자신이 확실할 때 진격한다.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는 이길 것 같이 대들면서 즉각 물러나야만 후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맹자 역시 ‘적의 힘을 헤아려 본 후에 싸운다’ 고 하였다. 싸우다 힘이 모자라면 젖 먹던 힘을 다해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날쌔게 도망가라.

회안에는 한신장군의 기념관과 어릴 때 많이 도와준 표모(漂母)가 있었는데 그녀를 기리기 위해 표모사가 있다. 표모사 내에는 묘와 보은정(報恩亭)이 있다. 찾아오는 사람 많지 않지만 넓은 곳에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한신기념관에는 사당을 비롯하여 가랑이 밑을 지나갔다는 과하지교(胯下之橋)가 있고, 그곳에 한신이 가랑이 밑을 지나간 모욕을 당한 곳(韓信胯下受辱處)라는 비석이 있다.

주은래(周恩來) 기념관
주은래는 중국의 초대 총리로, 모택동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모택동의 충실한 오른팔로 활동하면서 공산당 내 2인자로 군림했다. 그는 그 이상의 권력에 욕심을 내지 않고 백성을 사랑한 정치가로서 지금까지 많은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1898년 강소성 회안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할아버지 집안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러나 열 살 때 친부모를 비롯해 양부모까지 잃고 고아가 되어 절강성 소흥의 큰아버지 댁에 몸을 의탁했으며, 1917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중국에 대한 일본의 압력이 점점 커지자 귀국하여 천진 남개대학을 다녔으나, 5·4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로 체포되어 투옥되고, 대학에서 퇴학당했다. 파리 유학에서 유럽을 휩쓰는 개혁의 물결을 목도하며 다양한 혁명 사상을 받아들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자 1922년에 파리에서 중국공산당 지부를 조직했다. 그는 독일, 벨기에 등 유럽 각국을 거쳐 공산주의청년단을 선발했고, 1924년에는 국공합작을 위해 귀국하여 황포군관학교에서 정치부 주임으로 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1925년 손문이 사망하고,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학교도 문을 닫았지만, 이곳에서 배출한 군사들은 북벌, 중일전쟁, 국공내전에서 활약하며 중국 근대사에 족적을 남겼다. 국민당을 장악한 장개석은 국민당 내 좌파와 공산당을 경계하여 1927년 4월 상해에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주은래는 1927년 7월 국민당이 주둔하고 있는 남창(南昌)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닷새 만에 국민당 군대에게 패퇴했고, 광주(廣州), 상해(上海) 등지에서 연달아 봉기를 일으키며 괴멸된 조직을 재건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그는 대도시를 전면 공격하여 무력으로 탈취하는 소련식 군사작전을 시행했는데, 봉기가 연달아 실패하자 대도시를 상대로 한 소련식 전술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1931년 모택동이 주장한 ‘농민에 의한 혁명’ 사상을 지지하고, 주덕의 소규모 게릴라 전술을 채택했다.

1934년 대장정이 시작되자 그는 모택동의 지도력을 확인하고 군사위원회에서 물러났다. 또한 과거 홍군의 전술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모택동은 언제나 옳았다”라며 2인자 역할을 자처하며 보좌하기 시작했다.

이후 모택동의 이념과 식견을 인정하고 언제나 그를 지지함으로써 공산당 내부의 분열을 막고 중국을 개혁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계속하여 대립하는 가운데 일본의 침략 위험이 거세지자 중국 내 항일 운동의 기운도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그는 초대 총리를 맡아 노련하고 실용적인 외교노선을 견지했다. 모가 추진한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 급진적인 정책을 완화시켰으며, 1972년에는 중국을 방문한 닉슨 대통령과 회담을 통해 미중 국교정상화를 주도했다.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숙청 인사들을 보호했으며, 등소평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홍위군의 무자비한 파괴에 앞서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데도 노력했다. 그는 1976년 1월 8일 사망했으며, 모택동은 1976년 9월 9일 사망한 날보 앞서 사망했다.

회안 시내에 있는 주은래의 기념관은 넓은 호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입구에 등소평이 쓴 주은래기념관(周恩來紀念館)이라는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기념관 한바퀴 도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있으며, 현대사 중국인들의 기념관 중에 가장 잘 된 곳이라 말할 수 있다.
항우(項羽)의 고향 숙천(宿遷)

숙천은 항우의 고향으로 이곳의 명소는 항우기념관이다. 항우의 생가를 비롯하여 공연장, 외에도 많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입구에는 말타는 기마상이 커다랗게 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장병들의 격투장면, 우희(虞姬) 모양을 한 아가씨들의 화려한 연출 장면이 으뜸이었다.

패현의 유방 기념관이나, 회안의 한신기념관보다 아주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진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항우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항우(項羽)는 중국 진나라 말기의 초나라의 명장 항연(項燕)의 후손으로, 처음에는 숙부 항량(項梁)을 따르며 진왕 자영을 폐위시켜 주살한 후로 서초 패왕(覇王)에 즉위함으로써 왕이 되었고, 초나라 의제(義帝)를 섭정으로 도와 통치했으나 암살했다.

우리나라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모델이 되었고, 한편 유방으로 하여금 찬탈자를 친다는 명목으로 거병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의 죽음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문학의 소재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원나라 이후 희극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하였으며, 고려시대 이후의 문학에도 등장한다.

경극 중에서 항우와 우희가 이별하는 장면인 패왕별희(覇王別姬)는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1918년에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진승, 오광의 난이 일어나고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항량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수 은통을 참살한 뒤, 8천여 군사를 이끌고 차례로 주변 세력을 병합하였다.

숙부 항량이 진의 장한(章邯)의 계책에 죽자 격분하여, 스스로 상장군이라 칭한 뒤 하북(河北)에서 장한을 항복시키고 도처에서 진나라 군을 무찔러 진의 세력을 소탕하였다. 이 기간 동안 패현의 유방(劉邦)이 함양에 먼저 입성하여 함양왕이 되려하자 서둘러 함곡관을 향해 진군하였다.

유방이 함곡관에서 자신을 막고 항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유방을 죽이려 하였으나, 유방이 함곡관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에 항우는 유방을 홍문에 불려내 죽이려 하였으나, 장량의 계책에 빠져 결국 죽이지 못하고 유방의 항복을 받은 후 유방을 풀어줬다.

이후 항우는 함양성에 입궁하여 진왕 자영(子嬰)을 죽이고, 함양의 아방궁과 일부 건물을 불사른 뒤에 고향 팽성(彭城)에 돌아와 서초 패왕이라 칭하였다. 결국 해하성(垓下城) 전투에서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 군의 포위망에 갇혀있게 되었고 장량의 계책으로 초나라 병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항복하게 하기 위해 초나라 진영을 향해 초나라 민요를 연주하게 하였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항우는 참담하면서도 더욱 악에 받쳐 그 28기를 이끌며 강가로 달려갔는데, 그 와중에도 한의 정예병 5천이 추격하였지만, 항우는 그들을 단 28기로 격파하였고, 마침내 오강으로 달아나 그때까지 자신을 따르던 자제들을 모두 강남으로 향하는 배에 태웠는데, 이때 살아남은 기마의 수는 두 명만이 죽은 26기로, 몇 천 명을 상대로 싸워 두 명만이 죽고 유방과 한신의 지독한 추격을 따돌린 것이다.

항우는 훗날을 기약하자는 권유를 거부하였는데, 처음 회계에서 거병할 때 자신을 따른 8천의 강동자제들을 모두 잃고 이제 오직 26기만 살아있으니 강동의 백성들이 용서하여도 자기 자신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배가 강남으로 떠난 것을 보고 항우는 마지막에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싸워 수백 명을 죽이고 자신 역시 많은 부상을 입었다. 항우는 옛 부하 여마동(呂馬童)을 보고는 “유방이 내 목에 천 금을 걸었다는데 그 은혜를 베풀겠노라!”하고는 목을 베어 자살하였다.

항우는 진나라와의 거록전투, 유방과의 수수전투를 통해 역대급의 무예와 통솔을 자랑하는 장수이다. 그리고 그가 죽기 직전 지은 시인 해하가가 있다.

해하가(垓下歌)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때가 불리하여, 오추마는 나아가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力拔山兮 氣蓋世(역발산혜 기개세)
時不利兮 騶不逝(시불이혜 추불서)
騶不逝兮 可奈何(추불서혜 가내하)
虞兮虞兮 奈若何(우혜우혜 내약하)

유방(劉邦)의 고향 패현(沛縣)
유방은 지금의 강소성 패현 풍읍의 중양리 사람이다. 성은 류(劉), 자는 계(季)다. 그는 진나라 폭정에 반기를 들고 토벌에 나서 항우와 열세로 판도를 다투다 장량·소하 등의 걸출한 부하를 잘 부려 마침내 천하를 차지했다.

초한지(楚漢志)는 진(秦)나라 말기 초나라 항우(項羽)와 한나라 유방(劉邦)간의 대립을 묘사하고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만들어 폭정을 하면서 진나라에게 망한 6국들에서 반란을 일으킨 대표인물이 유방과 항우이다.

유방의 고향이며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 불려지는 패현(沛縣)으로 가게 되었다. 미산호를 답사하고 패현까지 승용차는 갈 수 있지만, 일반버스는 다닐 수 없는 도로로 울통불통함에도 불구하고 통행료를 받고 있었다. 패현에 도착하니 거리는 깨끗하였으며, 유방의 부하들 도로명이 많이 있었다.

패공원 입구에 들어가니 거대한 유방과 장량, 소하, 한신 등 장군들의 석상이 있었다. 이곳은 일반공원으로 유적지는 없고, 한성공원으로 가니, 그곳에 유방의 기념관, 궁궐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길 건너편에 한고조 원묘(原廟)가 있었는데, 시간이 늦어 안내원을 대동하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들어 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유방문화제를 2년에 한번씩 개최한다.

항우는 서쪽으로 유방은 동쪽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함양으로 향했다.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길에 항우와 유방은 엄청난 인재들을 얻게된다. 유방이 함양에 도착했을때 항우는 장한과 싸우다가 삼촌인 항량을 잃게 되나, 결국 진나라에서 장한을 버려서 장한은 항우에게 투항한다.

항우가 투항한 진나라 병사들이 불평하는 것을 듣고 진나라의 20만 대군을 몰살 시킨다. 그 후 항우가 함양에 도착하자 유방은 함곡관(函谷關)에서 문을 굳게 닫고 항우를 못들어 오게한다. 하지만 결국 유방이 항우에게 가서 사과하고, 그때 항우의 모사 범증이 유방을 죽이려고 했으나 번쾌가 방해해서 결국 실패하게 된다. 그 모사 후 장량이 머리를 써 유방을 탈출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지회(鴻門之會)이다.

서주 시내 공원에도 유방의 석상이 높게 만들어져 있으며, 서안의 병마용보다는 작지만 볼만하였다. 시내 공원에 연자루(燕子樓)는 당나라 무령절도사 장건봉과 관반반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설화가 있으며, 백락천과 소동파의 시비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순천의 연자루와 화순군 능주면 주자묘 앞에 연자루가 있다.

유방의 대풍가(大風歌)
大風起兮 雲飛揚  센 바람이 부니 구름이 높날리네.
威加海內兮 歸故鄕 위엄을 해내에 더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네.
安得猛士兮 守四方 어떻게 용맹한 군사들을 얻어 사방을 지킬까?

강하고 센 바람이 부니 모든 구름이 흩어져 달아나 없어진다. 바로 유방이 군사를 일으켜 세상의 난리를 평정함이 마치 바람이 구름을 날려 없애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내가 제위(帝位)에 나아가 위세를 사방에 떨치고 득의양양하여 고향에 돌아간다. 곧 창업(創業)을 이룬 것이다. 다음에는 어떻게 용맹한 사람들을 초빙하여 사방을 지킬까? 창업은 했는데 어떻게 해야 수성을 잘 할까 하는 내용이다.

유방은 반란을 평정하고 장안(長安)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고향인 패현에 들렀을 때 고향의 일가친척·친구자제 등 120명이 모여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 유방은 술이 취하여 축(筑)을 치며 이 노래를 부르며 춤까지 추었고 고향의 자제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 시는 제왕의 기상을 읊은 시로, 후세에 제왕이 되려는 이는 누구나 이 시를 애송했다. 이 시의 제 1구는 바람과 구름을 자신과 군웅으로 비유하여 자신이 군웅을 제거하고 천하를 통일한 웅혼한 기세를 흥(興)으로 나타냈다.

제2구에서는 개선장군이 되고 마침내 제위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고 늠름한 모습을 나타내어 앞의 구절의 승(承)으로 이어가고 있다. 제3구는 창업도 중요하지만 수성은 더 어렵고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각오를 피력하고 있다.

유방은 시골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허송세월하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기회를 잡아 반란군의 수장이 되고, 최종적으로 중국의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의 일생은 음미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그와 같은 출세담은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서주에 유명한 연자루가 있다.

연자루(燕子樓) 백락천(白樂天)

창에 가득한 밝은 달, 주렴에 가득한 서리
이불은 차고 등불 희미한데 잠 자리 추켜올린다.
연자루 안, 서리 내리는 달 밤
가을이 오니 오직 이 한 사람 위해 길기만하다.

滿窗明月滿簾霜(만창명월 만렴상)
被冷燈殘拂臥牀(피랭등잔 불와상) :
燕子樓中霜月夜(연자루중 상월야) :
秋來只爲一人長(추래지위 일인장) :

2018년 5월 23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