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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칼럼]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8
[강원구 칼럼]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8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8.04.12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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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홍구공원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곳으로 김구선생에게 찾아가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히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왕의 생일인 1932년 4월 29일 기념식을 거행할 때 폭탄을 투척하여 상해 파견 군사령관인 시리카와를 즉사시켰다. 3년이 지난 뒤 1945년 11월 5일 김구선생은 중경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홍구공원을 찾았다.

홍구공원이 지금은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국인들은 홍구공원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노신공원으로만 알고 있다. 이곳은 중국 근대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노신(魯迅)을 위해 만든 곳인데 노신의 동상과 묘가 여기에 있다. 묘에는 모택동의 친필로 묘비명이 써 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다닌 후로 윤봉길 의사의 기념 공원인 매원(梅園)과 매헌(梅軒), 그리고 기념비가 조금 떨어진 다른 장소에 만들어져 있다. 매정에는 10여년 간 아무 것도 없었으나, 1층에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이 들어섰다. 

상해의 대표적인 정원 예원(豫園)
밤중 내내 네온사인이 켜있는 남경로와 회해로는 백화점 등 주요한 상가가 밀집되어 밤낮으로 이동 인구가 많은 곳이다. 거리에는 밤마다 무지개가 뜨며, 도로 양편을 곡선으로 잇는 광고용 네온사인은 어둠 속에서 강렬한 빛을 내고 있다.

100m 간격으로 이런 네온사인 행렬이 계속되며, 백화점들의 화장품 매장에는 샤넬, 랑콤, 한국의 드봉까지 외국 유명 브랜드가 집결돼 있다. 회해로에는 손문의 부인 송경령의 고택이 있기도 한다. 원은 상해 유일의 명원으로 명나라 시대의 한 고관이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무려 18년이나 걸렸다.

정원이 소주의 졸정원이나 유원에 비해 소규모이지만, 설계의 고묘함과 치밀한 배치가 다른 정원에 비해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예원의 담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예원만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예원의 주인은 수차례 바뀌었으며, 개축과 개수를 몇 번이나 거쳤고, 1956년에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예원은 용의 조각을 올린 담을 기준으로 몇 개의 블록으로 나누어져 있다. 담 여기저기에 창이 있으며, 하나의 커다란 거울이 있어 정원을 비추어 넓고, 복잡하게 보이게 한다. 예원 옆에 예원상가는 함께 돌아볼 만한 쇼핑가로 수많은 전문상점이 좁은 골목에 빽빽이 들어차 하루 종일 관광객들이 북적댄다.

옥불사(玉佛寺)는 상해에서 관광객이 많은 선종(禪宗)의 명찰(名刹)이다. 석가모니좌상과 와불당에 모셔져 있는 석가열반상으로 유명하다. 석가상이 백옥으로 만들어져 있어 백옥 특유의 반들반들한 피부와 선명한 입술과 눈매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상해를 나타내는 글자 호(滬)
중국 각 지역을 나타내는 글자가 있다. 이것은 주로 자동차 번호판에 많이 사용되는데, 북경은 경(京), 상해는 호(滬)며, 천진은 진(津), 산동성은 노(魯), 강소성은 소(蘇), 절강성은 절(浙), 호남성은 상(湘)이다. 상해를 나타내는 호(滬)는 대나무로 만든 물고기를 잡는 어구이다. 그래서 상해가 옛날에 어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상해를 북경어로 ‘상하이’라고 부르지만, 상해 음으로는 ‘상해’라 른다.

상해의 자랑거리 남포대교는 현수교로, 빙글빙글 나사 모양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다리 위에서 황포강 외탄을 바라볼 수 있는데, 이 다리가 완공되면서 포동지구는 별천지로 바뀌게 되었다. 포동을 이어주는 다리도 있지만 황포강을 지하로 관통하는 도로가 있다. 마치 홍콩의 구룡반도와 홍콩섬을 이어주는 해저 터널과 같다.

상해 내에서도 경제 개발구가 몰려 있는 포동에는 특히 외지인들이 많다. 이들은 고급인력으로부터 막노동꾼까지 오늘의 포동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해 사람들이 즐겨 쓰는 농담에 ‘출신지를 비웃어도 못사는 것은 비웃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못살아도 상해인은 상해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중국 어디를 가더라도 서커스가 없는 곳이 없다. 서커스의 한자표기는 잡기(雜技)이다. 서커스 중에서 공 같은 원형에 오토바이를 탄 5명이 동시에 돌고 있는 모습은 아슬아슬하다. 모두가 구경하고 나오면서 하는 말이 ‘세상에 이런 서커스도 있구나’하면서 관객들은 모든 단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악수 세례를 퍼붓는다. 

영화황제 김염(金焰)
중국 영화황제 김염은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광산김씨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아직 아무도 받아보지 못한 ‘영화 황제’라는 칭호까지 받은 한 시대를 휩쓴 대표적인 영화배우였다. 김염은 두 살 때 아버지 김필순(金弼淳)을 따라 길림성 통화(通化)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의 외래 책임자이며 병원이 운영하는 의학교의 책임자였다.

그의 가슴 속에는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감추어져 있었다.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나 개인을 도와준 것을 일제 경찰이 알고 자신을 체포하러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단신으로 몸을 피해 통화로 갔다.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다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여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에도 일제가 마수를 뻗기 시작했다. 의사로서의 활동과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일제 경찰은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1916년 그는 다시 가족을 이끌고 일제의 영향력이 적은 흑룡강성 치치하얼(齊齊哈爾)로 옮겨갔다. 그는 그곳에서 시관병원의 의사로 취직을 하고 자기 집에는 개인병원을 열었다.

1919년 가을 그의 병원에 한 일본인 조수가 찾아와 근무를 자청했다. 조수가 필요했던 김필순은 그를 채용했다. 얼마 후 수술이 많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잠시 의자에서 쉬고 있을 때 간호사가 우유 한 병을 그에게 건너주었는데, 그것을 먹고 죽었다. 아버지가 죽자 그들은 이내 가난한 집이 되고 말았다. 둘째 고모부 독립운동가 김규식씨가 천진의 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겨 천진에 있었다.

김염은 ‘들장미’에서 주연을 맡은 상대역 여배우가 왕인미(王人美)였다. 이 배우도 ‘들장미’가 중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대히트를 하면서 일류 배우의 대열에 올라서게 된다. 그가 출연하는 영화는 연속해서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그의 인기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김염이 이렇게 중국 영화를 풍미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한 영화 잡지에서 영화팬들의 투표를 통해 중국에서 활동하는 영화배우들 중에서 영화 황제를 선출하기로 했다.

가장 잘 생긴 남자 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를 뽑는 것이었는데 이 세 부분에서 김염은 모두 1등을 차지하고 ‘영화 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칭호를 받은 배우는 현재까지 중국에서 김염 이외에는 없다. 따라서 그는 중국 유일의 영화 황제가 된 것이었다.

김염은 그의 아내인 왕인미와 헤어지고, 영화 촬영차 홍콩에 가 있을 때 진이(秦怡)와 만나 결혼을 했다. 진이의 전남편은 진천국(陳天國)이었는데, 그와 이혼하고 김염과 결혼하였다. 그들의 결혼식 주례는 대문호인 곽말약(郭沫若)이 맡았다.

김염과 진이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고, 그는 안정된 가정 생활로 돌아갔다. 신중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고 김염은 그동안 중국 영화에 기여한 공로로 일급배우로 임명된다. 그것은 장관보다 더 높은 대우였다.

신중국 정부가 수립된 후 주은래 총리가 북경의 중남해(中南海)로 그들 부부를 초청했다. 주총리는 “예술가란 대중의 소리에 답할 뿐, 지체 높은 사람들의 안색을 살필 필요는 없지요.”라고 하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공산당의 최고위층의 입에서 나온 이런 말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주은래가 얼마나 폭넓은 사고를 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은근히 김염의 손을 잡으면서 “당신은 이미 영화 황제가 되었지만, 또한 중국의 부마(駙馬)이기도 하오.”하는 것이 아닌가. 부마란 황제의 사위를 일컫는 말이니 그의 아내 진이는 중국의 공주라는 뜻이었다. 

2018년 4월 12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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