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04-25 16:50 (목)
[강원구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4
[강원구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4
  • 박부길 기자
  • 승인 2018.03.14 13: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의 국호(國號) 유래는 조그만 지역에 불과하다.
하(夏)나라는 중국이 국가를 형성한 시기이다. 우(禹) 임금은 원래 하후씨 부락의 수령으로, 순(舜) 임금이 죽은 후 그는 다시 부락 연맹의 수령이 되었다. 우(禹)의 아들 계(啓)가 대하(大夏)로 천도한 후 비로소 국호를 하(夏)라 하였다.

상(商)나라는 그의 선조 설(契)의 봉지로 하남성 상구(商丘)였고, 그래서 그의 14세 손 탕왕(湯王)이 하나라를 멸한 후 상나라라 하였다. 그 후 탕왕의 10세손 반경(盤庚)이 은(殷: 안양)나라로 옮겨 은나라라 하였으며, 중국인들은 주로 상(商)을 한국인들은 은(殷)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주나라는 무왕의 증조인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빈곡에서 섬서성 기산의 주원(周原)으로 옮겨,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한 후 주(周)라 칭하였다. 진(秦)나라는 원래 감숙성 천수의 산골짜기 이름이다. 진나라의 선조 비자(非子)는 주나라의 효왕이 그에게 말을 잘 키웠다는 공으로 영(嬴)이란 성을 하사하고, 진곡(秦谷)에서 성을 쌓게 하여, 진시황은 6국을 통일하고 진(秦)이라 칭하였다.

한(漢)나라는 유방(劉邦)의 적수인 항우(項羽)에 의해 만들어졌다. 항우가 초패왕으로 있으면서 여러 장수에게 분봉을 하였는데, 유방에게 교통이 불편한 한중(漢中)땅을 맡기면서 한왕(漢王)이라 하여, 이후 유방이 항우를 물리친 후 국호를 한(漢)이라 칭하였다.

수(隋)나라는 선조 양충증(楊忠曾)은 북주(北周) 태조에 의해 수국공(隨國公)이란 작호를 받고, 그의 후대 양견(楊堅)이 북주로부터 수왕(隨王)을 받았다. 양견이 정권을 잡은 후 국호를 정할 때, 남북조시대 국가들이 대 혼란하여 수(隨)에 지(之)를 빼어내어 수(隋)나라를 만들었다.

당(唐)나라는 태조 이연(李淵)의 할아버지인 이호(李虎)가 서위(西魏)에 있을 때, 당국공(唐國公)에 봉해졌다. 이연이 당나라를 세운 후 당(唐)이라 하였다. 송(宋)나라는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나라를 세우기 전 송주(宋州)절도사로 있었다. 송주에 그의 자취가 있어, 나라를 세운 후 송(宋)이라 하였다.

원(元)나라는 국호가 없이 몽고에서 시작하였다. 세조 쿠빌라이가 신하 유병중(劉秉中)의 건의에 의해 주역에 󰡐대재건원 만물자치(大哉乾元, 萬物資治)󰡑의 뜻으로 원(元)이라 칭하였다.

명(明)나라는 주원장(朱元璋)이 한림아를 송제(宋帝)라 하고 받들었는데, 그의 호가 소명왕(小明)이었는데, 유백온의 건의에 의해 한림아를 버리고 황제라 칭하였으며, 소명을 이길 수 있는 뜻으로 대명(大明)이라 하여 명(明)이라 칭하였다.

청(淸)나라는 동방의 뜻인 청색으로 만주족을 나타낸다. 그래서 청(靑)을 청(淸)으로 고쳤다. 누루하치가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였는데, 그의 아들 황태극이 한족이 역사상 금나라를 침략의 민족으로 원수라 생각하기 때문에 금(金)나라를 사용하지 않고, 여진(女眞)을 만주족으로 바꿨다.

빨강과 노랑을 좋아 하는 중국인
중국인이 좋아하는 색깔은 적색과 황색이다. 그들의 시조는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인데 염제는 불을 나타내는 염(炎)자가 있기 때문에 적색이고, 황제는 황(黃)자가 있기 때문에 황색이다. 우리는 빨간 색을 싫어하지만, 월드컵 경기를 치르면서 붉은 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그들이 싫어하는 색깔은 검정과 흰색이다. 그래서인지 축의금은 붉은 색 봉투에 넣는다. 만일 흰 봉투에 넣는다면 큰일이며, 흰 봉투는 조문 때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카오의 택시들은 거의가 검정색이다. 도박의 도시로 마카오에 들어와 검은 택시를 타면서부터 재수가 없도록 만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중국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글자는 황(黃)자다. 그들의 조상은 황제(黃帝)이고, 후손들은 황인종(黃人種)이며, 황제(皇帝)가 입는 옷은 황포(黃袍), 그들이 먹고살기 위해 생활하는 땅은 황토(黃土), 그들이 죽으면 가는 곳이 황천(黃泉)이며, 그들이 제일의 명산으로 생각하는 곳은 황산(黃山)이다.

또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중국문명의 발상지는 황하(黃河)이고, 현재 중국 최고의 발전을 이끌어 가는 곳은 황포강(黃浦江)이며, 강물이 흘러가는 바다는 황해(黃海)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황사(黃砂)도 중국에서 시작된다.

중국호텔의 이름은 다양하다.
중국호텔의 이름은 다양하다. 대만에는 반점(飯店)이 많고, 홍콩이나 마카오에 가면 주점(酒店)이 많다. 중국에는 반점, 주점 이외에도 빈관(賓館), 대하(大廈)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한다. 우리의 여관이나 여인숙 같은 것은 여관(旅館), 여사(旅社), 초대소 등도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화교들은 중국과 국교 되기 전 70년대부터 대만에 자주 다녔다. 화교들이 우리나라에서 중화요리를 많이 하기 때문에 반점이라는 명함을 갖고 다니면, 그들은 호텔을 한 줄로 알고 있었다.

반점과 주점은 같은 말이다. 옛날에는 밥집에서 잠도 재워 주었고, 주막집에서도 잠을 재워주었기 때문에 반점이나 주점은 같은 말이다. 또 빈관은 빈은 손님 빈(賓)이라 손님을 재워주는 곳이고, 대하는 큰 건물이라 하여 호텔은 물론 여러 가지 복합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식당은 찬청(餐廳)이나 주루(酒樓)를 사용하며, 나이트클럽은 야총회(夜總會)라 한다. 대만에서 이발관은 이발청(理髮廳)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

중국에서 여관은 일찍이 4천년전인 하(夏)나라시대부터 출현하였다. 이 시기에는 여관을 '역려(逆旅)'라 불렀으며, 역(逆)이란 영객(迎客) 즉 손님을 맞이한다는 말이다.

3천년 전의 상나라 시대에는 여관을 '역참(驛站)'이라 불렀다. 역참이라 공문이 배달되면서 관원들이 잠자는 곳이었다. 역참이란 말은 얼마 전까지도 사용한 말로 역(驛)을 나타내는 말인데, 역참에서 역(驛)은 한국과 일본은 역으로, 중국은 참(站)으로 바뀌어 졌다.

주나라 시대에는 '객사(客舍)'라 불렀으며, 춘추전국시대에는 '객관(客館)'이라 불렀다. 서한시기 장안에는 '군저(郡邸)'를 건립하였으며, 서한 중기에는 '만이저(蠻夷邸)'를 세워 외국 사절단이나 외국 상인들을 자게 만들었다.

남북조시기에는 '저점(邸店)'이라 불렀으며, 수나라 시대에는 '전객서(典客署)'를 두어 외국 사신들이 잘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당태종은 장안에 저제(邸第) 300여 곳을 만들고, 전국에 역참(驛站) 1639곳을 만들었다.

송나라 시기에는 사방관(四方館), 도정역(都亭驛)을 만들었으며, 일반 객상(客商)들이 잘 수 있도록 탑방(塌房)을 만들었다. 원나라 시대에는 전국에 참적(站赤) 1383곳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시기에는 북경에 '사이관(四夷館)을 설치하여 외국인들을 접대하였고, 당시 상해에는 객잔(客棧)이 출현하였다. 지금도 명청시대의 거리를 가보면 객잔들이 즐비하게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청나라 시기에는 여관이란 말이 보편화되었으며, 이외에도 낙타점(駱駝店), 화잔(貨棧), 계모소점(鷄毛小店) 등 다양한 말이 나오게 되었다.

2018년 3월 14일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